[천관우①] 이부영 “자유언론 표상···제대로 못 모신 회한 사무쳐”
[아시아엔=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동아일보> 해직기자, 전 국회의원] 천관우(千寬宇. 1925~1991) 선생을 떠올리면 먼저 송구스럽고 제대로 모시지 못한 회한이 앞선다. 우리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첫날부터 떠나온 날까지 우리의 ‘대장’이셨다. 그 대장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송함이 사무친다.
우리 언론사가 언제 한번 바람 잘 날 없이 평온한 적이 있었겠는가만, 천 선생께서 주필로 재직하던 1968년 말에 우리가 입사한 동아일보사는 폭풍전야의 전장 같았다. 3선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음모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아킬레스건인 ‘차관’에 관한 특집을 했다는 것을 빌미로 천관우 선생을 동아일보로부터 축출했다.
재벌들에 대한 외자도입 특혜를 지렛대로 장기집권을 위한 천문학적 정치자금을 비축하고 있던 박 정권에게 비수를 들이댄 특집이었다. 천 선생을 그대로 두고서는 자신들의 집권연장 계획이 순조롭게 진척될 수 없다는 것을 안 박 정권이 내린 결단이었다.
필자를 비롯한 동아 수습 11기와 천선생의 만남은 만나자 이별이었다. 우리들이 입사하자마자 터진 이른바 ‘신동아 사건’이 그것이었다. 그래도 수습기자 오리엔테이션 이후 주필과 수습기자 25명 사이에 벌어진 술자리는 이별주연으로선 손색이 없었다. 점심 식사 후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한창 나이의 25명 젊은 기자들과 주필 한 분과의 대작이었다. 25명의 수습기자 모두와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젊은 기자들이 하나 둘 곯아 떨어졌고 주필 한 분만 멀쩡하게 앉아계셨다. 나중에 편집국장을 지낸 김용정이 마지막까지 대작 상대였지만 이미 25대0으로 승패가 가려진 뒤였다.
그 당시 신문사 술 문화가 그랬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천 선생은 젊은 기자들과 합동 술자리를 가질 때 중국집의 배갈 됫병(한되 들이)을 시켜서 돌렸다. 이렇게 젊은 기자들의 기를 돋우고 요즘 말로 스킨십을 통해 굳은 정을 쌓았다. ‘우리 대장 천관우’가 되셨다.
1968년 말에 동아일보에서 강제퇴직 당한 천관우 선생은?1970년 2월 동아일보에 복귀, 상근이사로 사사(社史)편찬을 담당하였다. 허울뿐인 이사로 대접했지만 논설 등 글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놨다. 근무처도 3층 편집국과 별관 출판국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조그만 독방이었다.
1971년 4월경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천 선생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공동대표의 한 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편집부에 근무하던 필자는 자주 천 선생 방으로 호출당했다. 눈치로 보건대 안성열, 심재택 두 기자들이 따로따로 가끔 불려오는 듯했다. 자유언론투쟁으로 해직당해 동아투위에 함께 몸담았던 두 선배는 천 선생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을 떴다.
천 선생은 양면괘지에 특유의 필체로 유려하게 써내려간 시국관련 성명서 초안을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이병린, 유진오 등 재야인사들에게 회람토록 해서 서명을 받아오라는 부탁을 하곤 했다. 유진오 선생이 신병 요양 차 묶고 있던 유성 별장에 감시하는 정보과 형사의 눈을 피해 새벽에 찾아가서 서명을 받아온 적도 있었다.
당시 더 이상 대통령 선거는 없고 박정희 1인지배의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는 관측이 떠돌았다. 부정선거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재야와 대학사회의 저항이 계속되자 박 정권은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천 선생은 다시 동아일보사를 퇴사하였다.
천 선생께서는 1972년 10월유신을 통해 실낱같던 민주주의가 숨을 거뒀다고 판단하고 1974년 12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민주회복국민회의’로 이름을 바꿔 결성하고 투쟁하였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1973년 4월 장준하 선생의 비서로 있던 손수향과 결혼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없던 두 사람은 장준하 선생을 대부로, 천관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태평로 신문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천관우, 장준하 두 분 선생을 모시고 올린 결혼식은 그 뒤 필자의 생애를 결정짓는 고비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혼 후 첫 신접살림은 천 선생 댁 바로 옆의 전셋집에서 시작되었다. 천 선생 댁은 50년대말에 지은 국민주택이었고 필자의 셋집은 허름한 단독가옥 단칸방이었는데 필자의 집 바로 앞에 파출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천 선생 댁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였다. 그 골목 안에는 작가 이호철 선생 댁과 야당 김현수 국회의원의 댁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필자의 집까지 포함해서 네 집을 감시하는 중앙정보부원을 비롯한 정보기관원들이 파출소에 언제나 북적인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