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장기표의 제언···”대통령·국회의원·장관 노동자 평균임금 정도 받아야”
“실현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일에 여생을”
“민노총, 급여인상 자제하고 사회 바로잡는데 관심을”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은 노동자 평균임금 정도 받아야”
“행안장관 경찰청장, 이태원사건 정치적 책임지고 사퇴를”
이 글은 <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의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인터뷰를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재구성한 것입니다. <편집자>
‘운동권 대부’ ‘영원한 청년’. 대부야 그렇다치고, 영청이라는 건 철이 없다는 뜻이다. 본인도 그렇게 느끼고, 실제로 그렇다 토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7학년 8반 장기표(78) 신문명정책원구원장은 20대처럼 아직도 피가 끓는다. 철이 들지 않은, 그런 점에서 그와 나는 코드가 맞는다. 철이 너무 들면 녹 슬듯, 노쇠해져 에너지도 떨어진다. 난 그렇게 믿는데, 장기표 형도 그런 몽상 코드인 듯하다.
철은 4시사철의 변화를 알면 되지, 굳이 철들 필요까지…그렇게 나는 살아왔고, 기표형도 그렇게 살아갈 거다. 지난 8일, 그가 페이스북에 뭔가 비장한 글을 띄웠다.
“나는 올해에는 내가 판단할 때 실현가능한 일, 또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내 판단에 따라 일을 할 뿐 다른 사람에 끌려서 일을 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감히 말씀 드리건대 내 나이로 보나 살아온 인생으로 보아 이런 생각을 해도 사람들이 양해해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아직도 의욕이 넘치고, 또 오늘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서는 내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지만, 나이에 장사 없다는 말대로 나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금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되면 내년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금년에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하면 내 정치인생은 끝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일 또는 가능치 못해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많은 이해와 성원을 바랍니다.”
평소 ‘영청’답지 않게 너무도 비장감이 넘쳐 많이 궁금했다. 마침 엊그제 국립중앙박물관 부근에서 만난 김에 물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선 딱 부러지게 구체적인 답을 하진 않았다.
“(평생 고생시킨) 아내 조무하도 있으니 한마디 하겠다” 했지만… 그냥 페북 글에 준해 비슷한 정도의 애매모호한 표현만 했다.
그래서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를 정독했다. 거기에도 실마리가 딱 잡히는 건 아니지만, 언뜻 의중은 비쳤다. ‘국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드는 건, 해묵은 지론이다. 연합 윤근영 기자는 7일 신문명정책연구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덜 알려진 내용을 앞세워, 인터뷰를 재구성해서 전달해 보련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장관, 지자체장 등은 국민의 대표이자 심부름꾼으로서 근로자의 평균임금 정도만 받아야 한다. 이런 정무적 자리는 돈벌이나 권력 추구의 수단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실현 불능’이라고 나 역시 보지만…그래서 세상은 그를 이상주의자로 본다. “민주노총은 급여 인상을 자제하고 사회를 바로잡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정곡을 찔렀다.
그러나 배가 부른 노동귀족화한 민노총이 귀를 기울일 택이 없다. 역시 장기표답게 정곡을 찌른 건 다음 이태원 책임론에 관한 멘트다.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은 이태원 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게 맞다.” 이하 <연합뉴스> 인터뷰 재구성한 거다.
– 존경하는 사람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기득권을 모두 포기한 사람이다. 일본 강점기 당시에 명동 일대 땅이 모두 이회영 선생 집안 소유였다. 당시 돈으로 30만원, 요즘 돈으로는 2조원 정도 되는 규모다. 그걸 다 팔아서 신흥무관학교 기반을 만들었다. 이회영 선생은 여섯 명 형제들 가운데 셋째였는데, 형과 동생들을 설득해서 그렇게 했다.”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의 조상이 우당 선생이다. 올해 우당상을 받은 일본 총리 출신의 하토야마 역시 장기표처럼 이상주의자다. 총리까지 올랐지만, 미숙한 국정 및 약한 정치력으로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나는 1년 몇 개월 전, 그를 인터뷰를 한 연으로 이따금 소식을 듣는다. 동아시아 평화를 주창하는 그와 장기표는 만나면 흉금이 통할 거다. 정치 명문가 출신의 하토야마는 부자다. 브릿지스톤 대주주 중 한명이 그의 외가다. 부에 관해선 둘은 천양지차다…)
– 지금까지 본인의 삶은 성공적인가.
“실패한 삶이다. 개인적으로 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대한민국이 엉망진창이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삶의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의 자아실현을 통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내가 말하는 민주시장주의는 사회민주주의에다 자아실현과 생태주의를 보탠 것이다. 이윤추구보다는 자아실현을 중시한다. 자아실현은 사람들에 잠재된 소질과 취향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은 행복해진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는 자아실현이 안 된다.”
– 사회보장제도가 확충돼야 하나.
“국민의 기본생활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기본생활은 의식주와 의료, 교육을 말한다. 장학금을 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연말에만 불우이웃돕기를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불우한 사람이 없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 학생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봄에 장리쌀을 먹어야 했다. 쌀 한 가마를 빌리면 두 가마를 갚는 식이었다. 형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야 했는데, 발뒤꿈치가 갈라졌는데도 약이 없었기에 뜨거운 촛농을 부어 소독하곤 했다.”
– 서울대에 가자마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나.
“처음에는 판사가 될 생각이었다. 판검사 등 권력층 몇십 명으로 모임을 만들어서 세상을 바꾸자는 계획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보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학년 1학기에는 세미나에도 참여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친구들 대부분이 고시공부나 하려 했다. 실망한 나는 1학기를 마치고 김용기 장로가 운영하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가려 했다. 강의를 한번 들어보니 근검, 절약만 주장했다. 그렇게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 군대 갔다 복학 후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했나.
“1970년에 복학했는데, 그해 교내 4·19 행사 때 학생대표로 연설을 했다. 그 행사에서는 나 외에도 함석헌 선생과 4·19 선언문을 기초한 이수정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연설했다.”
–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는데.
“1학년 때 조영래(2학년)가 찾아왔다. 서울대 수석으로 입학한 조영래는 서울대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함께 세상을 바꿔보자고 그는 말했다. 그때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져서 조영래와 나는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들은 죽이 잘 맞았다. 조영래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으나 학번은 1년 위였다.”
– 조영래 변호사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집념이 강했고 글을 잘 썼다. 원래는 내가 전태일 평전을 쓰기 위해 작업을 했었다. 이소선 여사를 만나서 전태일 일기를 구해 어렵게 복사했다. 이 여사를 오전에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오후에는 노트에 정리하곤 했다. 그러다 나는 당시 생활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조영래에게 평전을 쓰라고 권했다.”
– 이소선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이 그때였나.
“전태일이 분신했던 1970년 당시 서울 명동에 있던 성모병원 맞은편의 삼일다방에서 이 여사를 처음 만났다. 그때 시신을 인계받아 서울대에서 장례를 치를 계획이었다. 이 여사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분은 나한테 모든 것을 배웠다고 했으나 사안에 대한 최종판단은 본인이 했다. 전태일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했다. 나는 인간과 세상을 사랑해야 사물을 똑바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태일이 그런 사람이었다. 전태일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이소선 여사와 한동네에 살지 않았나.
“징역을 살고 나왔을 때 이 여사가 도봉구 쌍문동 본인의 동네에서 살라고 했다. 그가 조그만 판잣집을 소개해서 그걸 샀는데, 재개발로 29평짜리 맨션아파트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집을 1억4천만원에 팔아서 1억짜리 집을 사고 빚도 갚았다. 이 여사와 전태일의 덕을 크게 본 것이다.”
(인터뷰를 한 연합뉴스의 윤근영 선임기자는 고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 인터뷰도 길게 했다. 한번 읽어볼 만하다.)
– 부인은 어떻게 만났나.
“선배의 집에 갔다가 만났다. 선배의 부인과 아내 조무하는 이화여대 학보사 선후배 사이였다. 아내의 첫인상도 마음에 들고 해서 결혼하자고 했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수배 중인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고 부탁했다. 결혼식은 왕십리의 중앙다방에서 둘이 차 한잔 놓고 했다. 신혼 서약을 하는 등 정식으로 결혼했다. 내가 도망 다니는 처지여서 사람들을 부를 수는 없었다.”
– 부인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나.
“내가 개똥철학(말솜씨)을 갖고 있었고 착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국문과 출신인 아내는 고교 국어교사였다가 그만두고 과외 등을 했다. 남의 집 방문해서 아이들 2∼3명 모아놓고 가르치는 방식으로 생계를 꾸렸다. 지금은 봉천동 25평짜리 집 역모기지론으로 매달 95만원이 나오고, 월남전 참전으로 정부와 서울시로부터 매달 나오는 돈, 기초연금 등으로 월 가계 수입이 250만원 정도다.”
– 간첩 이선실 사건으로 부부가 잡혀갔는데, 아이들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처가 식구들과 아내 후배들이 도와줬다. 아이들은 지금 다 커서 결혼했고 40세 안팎이다. 큰아이는 과학철학, 둘째는 국제정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직 교수는 안 됐지만 거의 교수급이다.”
– 자녀들은 아버지의 정치적 철학에 동의하나.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해준다.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때도 있다.“
– 사회주의를 지향한 적은 없나.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배운 것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에 빠진 적은 없다. 사회주의는 개인적으로 공부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도 경도된 적이 없다. 주체사상을 읽어봤는데, 10페이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의 동년배 운동권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한다’, ‘주체사상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사람이다.”
–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평등을 지향한다. 다 같이 잘살게 하자는 취지다.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북한이 잘사는 나라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회경제 시스템을 지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북한을 굉장히 좋게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했는데, 김일성은 더 장기집권 하는 것 아니냐”고 선배들에게 따지곤 했다. 진보정당에 있는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 간첩 이선실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이선실 사건은 1992년 발표됐다. 그는 민중당 사무실에 와서는 환심을 사기 위해 복사기를 사줬다. 당시 복사기는 드물었고 비싼 것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 찾아와 100만원을 줬고, 민중당 사무실 근처 다방에서 30만원을 건넸다. 그러더니 고향인 제주도에 아들이 살고 있는데, 그곳으로 돌아간다면서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빼낸 전세보증금 4천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진보적 정당운동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아들 집 옆에 집을 사서 거주하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나에게 돈을 주려 했고, 나는 끝내 받지 않았다.”
– 대화 중 김일성을 언급했다는데.
“이선실이 한번은 우리집에 찾아와서는 ‘김일성 주석께서 장 선생을 굉장히 좋아하신다. 김 주석의 뜻을 받들어서 통일운동을 함께 열심히 하자’고 말했다. 당시는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뒤여서 주사파가 극성을 부릴 때였다. 이선실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한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가 간첩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 이선실 사건이 조작이라 생각하나.
“나중에 내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는데, 그들은 내가 이선실한테 준 책을 갖고 있었고, 내가 이선실에게 한 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선실은 이미 강화도를 거쳐 북한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판단했다.”
– 사건을 누가 조작했다는 것인가.
“남한 중앙정보부와 북한 공안기관이 합작으로 조작했다고 본다. 국정원은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고, 북한 당국은 남한당국으로부터 돈을 받는 방식일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한에서 간첩사건이 발생하면 남한에 북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선전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좀 이해가 안 간다. 그 후에 노무현이나 문재인 때 국정원 과거사위 등에서 샅샅이 뒤졌을 텐데…)
– 당시에 부인도 구속된 것인가.
“아내는 당시 민가협 총무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당국은 아내를 구속한 것이다.”
– 국정원이 본인에 외국 유학을 권고한 적이 있나.
“1980년대 초반 ‘서울의 봄’ 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3년6개월간 도주하다 자진 출두했다. 그때 중앙정보부는 한국에 있으면 또 사건에 연루되니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라고 강권했다.”
– 대통령과 국회의원 월급이 근로자의 평균임금이 돼야 한다고 보나.
“작년 기준 근로자 평균월급은 350만원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장관, 차관 등 정무직은 근로자 평균임금을 받아야 한다. 고위 공직이 입신양명 또는 돈벌이의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국정 운영을 맡아 하는데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담당해야 잘 할 수 있다. 국회의원 특권도 점검해야 한다. 국회의원 본인은 연봉 1억3천만원을 받는다. 명절휴가비, 야근특근비, 야식비 등까지 지급된다. 이렇게 일괄 지급하는 것보다는 필요한 비용은 신청해서 받도록 해야 한다. 국회의원 면책특권, 불체포 특권도 사라져야 한다.”
– 본인이 민노총 위원장이라면 지금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민노총 위원장이라면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기업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는 하청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떨어트린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다. 적어도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월급을 많이 받으니까 행복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사회를 바로잡는데 진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
–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됐다는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민주화가 이뤄진 뒤의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다. 민주노총은 민주화가 이뤄진 다음에야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한국노총에 대해 어용이라고 욕하지만, 한국노총이 노조운동을 할 때는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면서 해야 하는 엄중한 상황이었다. 민노총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 대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가 수십억, 수백억 대 연봉을 받는 건…
“삼성전자 등기이사의 평균연봉이 70억원 정도다. 200억원 이상을 받은 최고경영자도 있다. 회사의 직원들 평균임금이 1억원이라면 70배, 200배에 달하는 것이다. 서유럽 국가들은 7∼8배 정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들이 월급 주는 것을 규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금을 부과해서 그들의 실질소득을 줄일 수 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을 면박한 일이 있었다던데.
“1987년 12월 13대 대선 전에 나는 감옥에 있었다. 아내를 통해 김대중한테 편지를 보냈다. 김영삼은 1971년 김대중한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빼앗긴 후 계속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 김대중이 양보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아내로부터 편지를 건네받은 그는 “장 선생이 교도소에 있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면서 거부했다.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된 후 김대중이 교도소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평민당 총재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지역 구도에 기반한 4자필승론(영남은 노태우와 김영삼으로 표가 분산되고 충청은 김종필에게 가므로 김대중은 호남과 서울표로 대선에서 이길 것이라는 논리), 황금분할론 등이 말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냥 웃었다.”
– 윤석열 정부는 잘하고 있나.
“이태원 참사로 158명이 죽었다.(정부 공식집계 사망자. 부상 후 극단적 선택 1명을 포함하면 159명) 행안부 장관이나 경찰청장이 사람들이 죽도록 유도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열심히 살폈더라도 물러나는 게 맞다. 실질적 책임이 있는지를 따져서 진퇴 여부를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제에서는 장관과 총리가 방패막이가 돼야 한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다.”
–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많이 했나.
“초중고 시절에는 책을 못 읽었다. 가정교사를 해야 해서 시간이 없었다. 대학교 때도 유명한 일류 가정교사였다. 여름방학 때는 부잣집 아이들과 강릉으로 해수욕을 가서 방을 빌려 공부를 가르치곤 했다. 책은 교도소 생활과 수배 생활을 하면서 많이 봤다. 70년대 전체, 80년대 전체, 90년대 초반까지 수배와 투옥 등으로 혼자 지냈는데, 책 읽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었던 게 없었다.”
– 감옥에서는 주로 무슨 책을 읽었나.
“교도소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면 대부분의 책을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 토플러 등이 쓴 과학기술 책을 많이 읽었다. 지금도 과학기술, 팬데믹 등과 관련한 책이 나오면 거의 모두 구입한다.”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 감기에 걸려도 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거나 쉬는 방식으로 치료를 한다. 보통 6시에 일어나서 맨손체조를 두번 하고는 집 근처 관악산 아래에 있는 공원에 가서 운동기구를 이용해 운동한다. 잠을 잘 잔다. 자기 위해 누우면 거의 10초 안에 잠에 빠진다.”
– 좌우명이 있다면.
“전화위복을 중시한다. 그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라고 믿는다. 살아오면서 실패도 많이 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사람은 어떤 화(禍)를 입었을 때 좌절에 빠질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이다. 어려움은 오히려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 생활의 원칙이 있다면.
“과거부터 ‘골프 안 하기’와 ‘외제 차 안 타기’를 실천하고 있다. 재야 출신들이 해방됐다고(민주화됐다고) 해서, 또는 돈이 좀 생겼다고 해서 골프 하러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정치인 김상현씨가 나를 좋게 봤는데, 그분이 골프를 여러 차례 권했다. 정치를 하려면 골프를 알아야 한다면서 골프에 입문하면 도구 일체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정치인들이 앉으면 골프 이야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인생에서 곤란한 점이 있었다면.
“국회의원 선거에 7차례 나갔다가 모두 떨어졌다. 물론 낙선할 것을 알고 출마하기는 했었다. 아내는 친정 식구들에게(민주화운동을 했던)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두 국회의원에 당선되는데, 왜 ‘장 서방은 왜 안되나?’ 물으면 설명하기 힘들다 했다. 아내는 ‘나도 당신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는데, 우리 친정 식구들은 어떻게 이해하겠느냐?’고 했다.”
– 앞으로의 꿈과 계획은.
“나의 신념과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계속 정치활동을 할 생각이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대량실업, 소득양극화, 환경파괴, 인간성 상실을 극복하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가치관을 우리 사회에 세우고 싶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정치인들을 지지하면 안된다. 편 가르기에 편승하거나 비합리적 판단을 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지지해왔던 것에 대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한다.”
장기표 원장은 1945년 12월 경남 밀양에서 났다. 마산공고를 거쳐 서울법대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민청학련, 청계피복노조, 민중당사건으로 9년간 수감, 12년간 수배(도피)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