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 ‘부자되는 법’ 말고 ‘부자로 사는 법’부터

“부디 이 땅의 부자들도 불경기에 돈을 잘 쓰게 만들자. 나라 정책으로 돈 잘 쓰는 부자들에게 인센티브라도 주자. 그래야 돈이 돌고 돌아 윗목에서 벌벌 떠는 서민대중 민초들도 먹고 살 수 있다. 선순환의 낙수효과를 내도록 부자들이 돈을 펑펑 쓰게 만들자 이 말이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표지

오랜만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 전, 내가 100일간 머문 남양주 금선사를 다녀왔다. 금선사 가는 길에 동행한 현자 한 분이 말한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법에만 핏발 세우고 골몰하는데 그것은 전도몽상”이라는 거다. 왜냐하면, 그렇게 개같이 돈을 벌어본들 정승처럼 쓸 줄 모르면 꽝이란다. 돈도 써봐야 쓰는 법을 안다. 쓰는 법을 모르니, 그저 돈을 쟁여놓고 누가 훔쳐갈까 전전긍긍한다. 금고에 쌓아놓은 돈을 노리고 친지가 손을 벌릴까봐 사람도 안 만나고 은둔형으로 칩거한다.

고 정주영 같은 천재 재벌 창립자야 구두가 낡고, 혁대가 너덜너덜 해도 괜찮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사장이 그러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주영은 남대문 시장통에서 순대국을 먹어도 ‘멋져부러!’다. 그렇다고 현대차 사장이라는 자가 게걸스럽게 순두부나 먹고 하면 가오가 서겠는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처신할 줄 알아야 한다.

돈 쓰는 법부터 배운 뒤 돈 벌이에 골몰하라!

일본 재벌이나 상류층은 1년에 한번씩 몇백만엔 하는 기모노와 같은 전통의상을 사곤 한다.  옷 만드는 장인들이 먹고 살게 해, 문화의 전승이 이뤄지도록 베푸는 마음 씀씀이의 실천이다.

우리에겐 이런 미덕이 없다. 청부淸富가 과거엔 드물어 돈을 흥청망청 쓰다간 졸부라는 시기와 질시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은 거의 없어졌다. 몇억대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마이바흐, 마세라티 같은 외제차는 사도 우리 한복이나 삼베 옷 사는 부자는 없다. 돈 쓰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

부디 이 땅의 부자들도 불경기에 돈을 잘 쓰게 만들자. 나라 정책으로 돈 잘 쓰는 부자들에게 인센티브라도 주자. 그래야 돈이 돌고 돌아 윗목에서 벌벌 떠는 서민대중 민초들도 먹고 살 수 있다. 선순환의 낙수효과를 내도록 부자들이 돈을 펑펑 쓰게 만들자 이 말이다.

경제가 심각하다. 잘못 하면 오뉴월에 얼어죽는 사람 나오게 생겼다. 금융권 대출 규제로 흑자 도산이 속출할 거다. 현금 쟁여놓지 못한 사람들 헐값에 부동산 날린다. 자금 흐름의 경색은 마지막 수순으로 대기업과 금융기관까지 부실화 할 수 있다. 부자가 돈 좀 잘 쓰게 하는 나라 만들자. 그러기 위해선 경제의 핏줄인 돈부터 돌게 하라. 서민을 위한 나라가 별 게 아니다. 윗목으로 온기가 전해지고, 낙숫물이 떨어져 춥고 목마를 일이 없게 하면 된다.

부자되는 법을 가르치는 책은 쌓이고 쌓였다. 그러나 부자로 사는 법을 가르치는 책은 안 보인다. 옛날부터 지구상에는 깨달은 현자들이 수두룩했다. 종교를 통해서건 수도나 고행을 통해서건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문제는 돈오점수를 부단히 실천해야 한다. 한번 도를 통해 깨달았다고 만사가 끝난 게 아니다. 깨닫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베스트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김진명 작가의 에세이집 제목이 재미있다. <때로는 행복 대신 불행을 택하기도 한다>. 제목이 큰 글자도 아니고, 길기도 참 길다. 그러나 의표를 찌른다. 이 책에서 김진명은 역설한다.

부처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많은 깨달은 자들이 자신 앞에 닥치는 길고 긴 삶의 여정에서 여전히 먹어야 하는 육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파계하거나 스스로를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에 비해 부처는 죽을 때까지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붓다는 깨달음의 본질을 몸으로 실행했다.

깨달음을 얻은 현자는 결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본능적이고 쉬운 길을 가지 않는다. 남을 위해 무겁고 어려운 길을 가는 존재이며 깨닫는다는 것은 이런 자세를 뜻한다.

붓다는 기나긴 삶을 통해 몸으로 실천으로 보여줬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는 건 남을 위해 봉사하는 거다. 세상의 고등종교는 매한가지다. 자비를 사랑이나 또다른 무엇으로 바꾸면 된다. 그 가르침은 한결같이 남을 위해 살라는 거다. 살다보면 덧없음과 때로 절실하게 마주한다. 그러나 참된 니힐(Nihil), 즉 허무나 무상함이란 모든 것의 부정이나 비관이 아니다. 극한의 허무에 직면해 한 번 더 힘을 내야 한다. 그렇게 긍정의 올바른 크나큰 길을 찾아야 한다. ‘대도무문’이라,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 부자로 사는 법도 많은 길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돈이 없더라도,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강수연이 설파했듯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참된 부자로, 베풀며 부자답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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