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 찰스 디킨스, 불우하고 화려하고

디킨스

그는 12살 때 엄마를 뇌리에서 지웠다. 아버지는 경제관념이라곤 없는 한정치산자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가정사에 무심하고 아이를 공장으로 내몰았다. 가족이 모두 마샬시(Marshalsea Debtor’s Prison)라는 빚쟁이 감옥에 갇혀, 혼자 일했다. 10대 초반,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중노동을 해야 했다. 하루 12시간씩, 6일간 주 6실링의 쥐꼬리 봉급이었다. 영미권에서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치는 찰스 디킨스 얘기다. 빅토리아 왕조 때 그는 작가로 눈부시게 활약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재위, 엘리자베스 2세가 6년을 더해 기록을 깨기 전까지 최장기 기록을 세웠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재위 기간,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대영제국은 식민지 경영과 산업혁명으로 번영을 구가했다. 대영제국은 영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막 싹트기 시작한 시절, 그늘도 짙었다.

디킨스의 위대함은, 대영제국의 그늘도 조명을 해서였다. 풍요와 번영의 뒤켠에서 가난의 질곡에 시달리는 약한 사람들, 빈곤 서민층 어린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디킨스가 후반기에 쓴 작품이 바로 ‘두 도시 이야기’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런던과 파리 두 도시를 드나들며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건 한 남자의 운명적인 사랑 스토리다. 

디킨스의 부친 존은 해군의 하급 총무관리였다. 그러나 연일 파티를 연다든지 귀족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변변한 유산도 없는 이의 낭비벽, 집안은 나락에 떨어진다. 디킨스가 천재 작가로 탄생한 것 역시 8할이 바람이었다.

아버지가 해군 하급 관리로 전근을 다니다 보니 여러곳을 옮겨 다녔다. 군항이던 포츠머스에서 런던, 체덤을 오가며 유년을 보냈다. 나중 청년기 기자 때도, 출세 후 인기 작가 때도 바람 쐬며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8할이 바람이면, 디킨스를 키운 2할은 지독한 가난인가? 아니, 거꾸로 지독한 가난이 위대한 작가 탄생 주요인이다.

디킨스는 1812년 포츠머스, 해군 하급관리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흥청망청 귀족 시늉을 한 낭비벽의 호인이었다. 빚을 많이 져 마샬시 빚쟁이 감옥에 수감된다. 모친마저, 생계가 어렵자 동생 셋을 데리고 같이 들어간다. 디킨스는 런던 템즈 강변 악취가 진동하는 구두약 공장에서 주 6일 12시간 중노동을 한다. 1823~24년, 그의 나이 겨우 11~12살 무렵이다. 19세기 산업혁명, 자본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다. 대영제국의 풍요와 번영 뒤켠에서 그늘도 짙었다. 빈곤층은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과 저임에 시달렸다. 주에 6실링, 하숙집에 갖다 바치면 남는 게 없었다. 남은 돈으로 일요일, 마샬시 감옥으로 가족을 보러 갔다.

유년기의 디킨스는 지독한 가난과 중노동에 뼈가 저렸다. 산업혁명 후 발흥한 자본주의 모순이 깊이 새겨졌을 거다. 뼈를 깎는 체험들이 올리버 트위스트 등의 소재로 등장한다. 스케치하듯, 탁월하게 빈민층 생활상을 그려낸 원동력이다. 1824년 말, 아버지가 드디어 감옥에서 풀려났다.

디킨스는 중노동에서 해방돼 학업을 재개하리라 여겼다. 웬 걸, 어머니가 계속 쥐꼬리만한 돈이라도 벌기를 바랬다. 지옥같은 중노동, 열악한 환경의 구두약 공장을 더 다녔다. 그때, 어린 마음에 깊고 모질게 상흔이 남았다.

후에 전기작가에게 술회하기를, “어머니는 12살 때 죽었다”고 했다. 1년 여 만에, 간신히 학교로 돌아와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연극에 관심이 깊었으나, 학창은 닫히고 생업 전선에 뛰어든다. 디킨스는 지독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 분투 노력했다.

1827년, 15살 때 변호사 사무소의 사환으로 취직했다. 잔심부름을 하다, 쉬는 시간이면 길가로 나와 행인과 도시풍경을 관찰했다. 매일 밤마다 용돈을 아껴, 극장에 드나들며 연극에 푹 빠져 3년간을 보냈다. 1830년, 18살 때 대영박물관 라운드 열람실에 등록한다.

하원을 취재하는 기자가 되기 위해 독학으로 속기를 배웠다. 대영박물관 라운드 열람실! 디킨스 외에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오스카 와일드, 코넌 도일과 같은 문인들도 그곳의 단골 출입자였다. 대륙에서 망명한 위험한 사상가, 마르크스나 레닌 역시 거기서 세상을 뒤집는 사상과 이론의 기초를 닦았다. 정규학교 세례를 거의 못 받은 디킨스는 천재적 문학성의 원천을 대영박물관 독서라고 본다. 1년 만에 속기사 자격을 딴 뒤 법조 취재 임시직 기자가 됐다. 그러나 꿈은 웨스트민스트의 하원을 출입하는 정치부기자였다.

1831년 <미러 오브 팔리어먼트>를 거쳐, 유력지 <모닝 크로니클> 기자가 된다. 1834년 8월, 두번째 단편소설 ‘보즈(Boz)’를 필명으로 낸 직후의 일이다. 출세길의 시작이었다. <모닝 크로니클> 편집국장 조지 호가스의 눈에 들어 런던의 상류사회 셀럽들과 친교를 맺는다. 호가스 자택을 드나들며, 장녀 캐서린과 사랑에도 빠져 백년 가약을 맺는다.

첫 데뷔작 ‘보즈의 스케치’가 1836년 2월 출간됐다. 기자 때, 영국 곳곳과 유럽 대륙 여행을 많이 다녔다. 이 시기에 풍부한 관찰력과 예리한 식견까지 갖췄다. 1837년 출판한 장편소설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Pickwick Papers)’은 뛰어난 유머로 큰 인기를 얻었다. 성공한 사업가 사무엘 피크위크가 런던에 와서 좌충우돌하는 스토리를 코믹 터치로 리얼하게 그려냈다. 연재 소설이 선풍적 인기를 끌자, 캐릭터 상품까지 등장했다. 피크위크 모자와 시가, 노래책까지 구즈가 그때도 유행했다. 연재물 마지막 회 신문은 4만부나 날개 돋친 듯 팔렸다. 25살의 약관의 나이에 디킨스는 이미 인기작가 반열이었다. 도스토옙스키도 옴스크 유형 때, 이 소설을 읽었을 정도였다.

1838년 ‘올리버 트위스트’ 역시 인기몰이를 했다.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상 최초 작품이었다.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매년 빠짐없이 연극으로 상영된다. 산업화 물결이 도도하던 대영제국, 도시 하층민 실상을 고발했다. “나는 모든 역경에서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는 선의 원리를 소년 올리버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디킨스)

‘옛 골동품 상점’, ‘A Christmas Carol(크리스마스 캐럴)’역시 빈곤층을 생생히 묘사하고 사회 모순을 비판했다. 이들 작품으로 디킨스는 文名을 드높이 떨친다. 1850년 출판한 자전적 ‘David Copperfield(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쓸 무렵부터 작품 분위기가 어두원진다. 7년 뒤, 발탁한 27살 연하의 여배우 엘렌 터넌과 불륜으로 작품의 분위기가 더욱 어두워졌다는 게 정설이다.

디킨스는 이전까지는 모범적 가정을 이뤘다는 평을 받았다. 1858년 첫 부인 캐서린과 결국 갈라섰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을 비롯해 수많은 소설과 단편, 수필을 남겼다.

1850년 3월, 주간지 ‘하우스홀드 워즈’를 창간해 인쇄 발행 편집인으로 맹활약했다. 원고청탁과 데스킹, 독자편지까지 1인 6역 경영수완으로 몇 개월만에 4만부를 넘겼다. 조지 엘리엇을 비롯한 유명 필자를 다수 확보했으며 자신의 소설, 에세이까지 게재했다. 그는 자선 사업에도 참여하고, 어린이 연극도 상연했다.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뼈저린 통찰에서였다.

그는 영국 도시들을 돌면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공개낭독회를 가졌다. 미국에 이어 호주로 해외원정도 수시로 했을 만큼 그의 낭독회는 인기를 끌었다. 최고 작가에 오른 뒤, 전기작가에게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스토리인 ‘공장과 감옥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30년 뒤, ‘리틀 도릿(Little Doritt,1857년)’에서 되살렸다. 런던 시는 디킨스를 기려 길 이름을 ‘리틀 도릿’으로 붙였다.

1870년 6월 9일, 디킨스는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디킨스는 식사 후 평소처럼 집 주변을 산책하다 쓰러졌다. 땅바닥에 누워 있으라는 행인의 말을 듣고, “On the ground?!”라는 말을 한번 외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찰스 디킨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그렇게 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검소하게, 허세부리지 않고, 철저하게 가족장으로…” 그의 유언대로 장례는 조사도 찬송가도 없이 조촐하게 치러졌다. “디킨스는 빈민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가장 깊은 연민을 느낀 사람이었다.”(빅토리아 여왕)

찰스 디킨스의 <스쿠르지> 뮤지컬 포스터. 스쿠르지 영감의 회심이 깊이 닿는 작품이다

천재 디킨스는 카를 마르크스도 저작에서 언급하고, 찰스 채플린도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같은 소설가인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러시아의 문호들만 그를 좋아한 게 아니다. 디킨스는 수전노 스쿠루지를 변화시킨 크리스마스의 아이콘으로 독특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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