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늙음도 미리 계획해 선행 학습하길

나는 시건방지다. 마음대로, 꼴리는대로 살고, 남을 마구 비방, 비방은 아니라 근거를 갖고 거칠게 비판도 한다. 10여년 전, 나는 150살까지 살려고 작정했다. 그때 나보다 예닐곱 위가 언론에다 120살 수명 운운, 그렇게 30년을 높여 150에 맞춰 인생 계획을 다시 세웠다. 러프하게 10년 단위로 무구 장대한 라이프 스케줄까지 짰다.
물론, 삶을 정밀화로 짜놓은 아해들이 보기엔 황당무계하다. 그럼에도 <기생충>의 애비 송강호가 말한 바, 내게 ‘계획’은 있다. 그 피날레는 경주 최씨의 비조인 명문장 고운 최치원 선생 본받기다.

가야산 두류산 등지에서 세속의 옷을 벗고 홀연 종적 감췄다. 100수 넘을 때, 세상과 연을 모질게 끊을 작정이다. 최치원 선조처럼 홀연 사라져 세간과는 연을 끊을 생각이다. 늙음도 계획하고, 선행학습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의 실천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얼핏 황당한 영화의 제목이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 나이가 들면 모두 외계인 같은 존재들로 ‘막’ 대함을 받는다. 우리 모두가 삶에서 벌써부터 은연중 느끼고 있는 바 아닌가?

어릴 때는 몸 펄펄 날다 무릇 다가온 신체변이 현상 말이다. ‘어떤 할매, 어떤 할배가 되고 싶은가’ 스스럼없이 물어보라! 우리 모두가 언젠가 처하고 말 ‘홀로 노인’, ‘기억 백치’의 앞날이다. “늙은 인간들을 단디 보자!”고 주창하는 선각들도 없진 않다.

노청老靑 단디 분간, 젊은 청도 늙은 노도 미래를 깨우치게 하자. 그래서 선행학습이 필요한 거다. 더불어 사는 상생의 지혜다. 테두리를 미리 좁히면 한도 없이 자기중심, 이기적(Ego-centric)이고 만다. 삶의 테두리를 넓힐수록 스스로와 주위 삶의 질도 좋게 만든다.

장애우 노숙인들 돕기의 실천이 결국은 스스로 돕는 길이다. 그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공덕으로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다. ‘늙어감’과 ‘불편함’을 남의 일로 못 본 체하는 그 어리석음들이여. 그건 우리 모두의 운명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바의 그 무엇이다. 서울역에 잠든 노숙인도 붉은 얼굴에 검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지금은 비록 노인성 질환에 소주병을 껴안고 있지만 말이다. 힘들게 계단 오르내린 장애우도 불편 핸디캡만 있을 뿐이다. 그들도 한때 부모 형제가 있었지만, 지금 거둘 사람이 없다면…우리 모두 언젠가 처할 유약한 노인의 처량함과 유사하다.

이들을 차별하거나, 모진 삶의 뒤켠에 버려두고 혐오하려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이 모두에게 절실한 까닭이다. 늙음과 장애, 차별하는 비인간성을 모두 뼈저리게 반성하자. 뭘 어떻게 실천하며 그들 삶이 나아지게 할 수 있을지 통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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