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화제] ‘계약연애’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사르트르(오른쪽)와 시몬 드 보부아르

[아시아엔=최영훈 다문화 아시아공동체학교(AC) 이사장,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절박하고 간절해야 글도 써지고 명 작품도 나오는가? 

발칙한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

논쟁적인 삶, 아니 문제적 삶을 살았을까? ‘제2의 성’ ‘위기의 여자’로 파란만장했다. 파리에서 나, 파리에서 진 파리지앙이었다. 사후에 더 유명해져 준 사상가 반열에까지…

그는 법조인이던 아마추어 배우와 베르됭 출신 은행가의 딸 사이에서 났다. 어릴 때 상류층으로 사립학교를 다닌다. 제1차대전 후 외가의 파산으로 가난의 늪에 빠진다. 그의 가족은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부부관계 역시 타격을 입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 선호를 알아챘다. 아버지는 그러나 “넌 남자의 두뇌를 갖고 있다”고 했다. 보부아르는 조숙하고 뛰어난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희곡과 문학을 딸에게 귀띔했다. 14살 때 모태신앙인 가톨릭을 버린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했다.

15세부터 보부아르는 작가를 꿈꿨다. 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사르트르도 만난다. 그곳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9번째 프랑스 여성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사라진 아버지’가 둘을 평생 묶어준 계기였다. 법적으로든 사실로든 결혼을 한 일이 없어서 둘은 ‘계약결혼’이 아니”라 “계약연애’라고 하는 게 더 적확할 거”라고 ‘천재작가’ 조성관은 말한다. ‘Democracy’는 민주정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일본에서 그것을 민주주의로 옮기자 그리 쓴다. 계약결혼도 그런 ‘개똥번역’의 산물일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찰떡궁합이었다.

“내 열다섯살 소원에 딱 들어맞았다. 그는 또 하나의 나…” ‘아버지의 부정’, 아니 보부아르에게만 그렇다. 부르주아적 가치관이나 관습을 버리고 절연하려 했다. 회의론자요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응원해주리라…의외로 그렇게 말한 시몬에게 불같이 화 내고 비난한다. 이후 시몬은 정신세계에서 아버지를 ‘영구 삭제’ 했다. 그러니, ‘부(父)의 부정(否定)’이다.

사르트르는 1살 때 부친을 여위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옳다. 의부에게 학대를 당하고, 한쪽 눈을 잃어 방황한다. 그런 내력의 둘은 기성체제의 ‘부정’에 쉽게 합의한다. ‘개인주의적 반역’, 혁명이 아닌 쁘띠부르주와적이다. 둘은 루브르박물관의 육중한 석재 벤치에서 계약한다.

지참금 낼 돈이 없어 포기했던 결혼이다. 아이 낳지 않고 사생활에 간섭도 않는다. 그렇게 2년 단위로 갱신하는 계약연애다.

2년 단위 계약연애의 조건

하나. 관계를 지키되, 다른 사랑에 빠지는데 동의한다.
둘. 상대에게 거짓말을 않으며, 숨기지도 않는다.
셋, 서로 경제적으로 독립채산해 별도로 생활한다.

결혼, 일부일처, 모성, 가정까지 ‘No!’다. 두 천재가 고안해낸 ‘새 모델’의 만남이다. ‘실존적’ 계약연애는 50년 넘게 지속했다. ‘사랑하는 데도 자유를, 독립해 있지만 결합을…’

이렇게 산 둘에게 쁘띠 부르주아 낙인도 찍힌다. 둘은 1급 교원자격시험(agrégation)에 합격한다. 최종 성적은 사르트르가 1등이고, 시몬은 2등을 한다. 1931년 둘다 교사로 임용된다. 시몬은 마르세이유로 발령난다.

지방을 전전하다, 2차대전 직전 파리로 온다.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소개된 신간을 빌려 죄다 읽었다. 책벌레였다. 방학 때마다 유럽 곳곳을 여행할 여유는 됐다. 생제르망 가의 카페 되마고에서 주로 글을 썼으나 별로였다. 그곳에는 글 쓰는 인간들이 구름같이 몰렸다. 사르트르와 피카소, 카뮈, 제임스 조이스, 브레히트,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까지…

소르본 시절 평생 별명(비버, Castor)을 얻는다. 성 Beauvoir가 영어 “Beaver”와 발음이 비슷했다. 사르트르와 친구들은 비버만큼 성실한 시몬에게 붙여줬다. 사르트르는 심각한 사팔뜨기였다. 그래도 둘은 서로의 지적 능력에 깊이 빠졌다. 둘이 작가로 눈을 뜬 계기는 제2차대전. 사르트르는 1940년 6월 독일 침공 때 포로가 된다.

“포로들과 연대하며 개인주의적 반역, 뿌리깊은 사생아적 감각도 없어졌다.“ 나치점령 시대, 살아 남으려면 비겁해야 했다. 전쟁 장기화로 물자부족 사태는 심각했다. 생제르망의 추운 되마고에서 따듯한 플로르 카페로 옮긴다. 카페 외에 갈 곳도, 쓰는 일 외에 놀 것도 없었다. 그저 원고지를 메우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35살까지 작품을 제대로 못 썼다. 절박하고 간절해야 글이 나오는 모양이다.

첫 작품 ‘초대받은 여인’…사춘기 소녀 등장 야릇한 3각관계

1943년, 첫 작품 <초대받은 여인>을 냈다. 데뷔작이 바로 선풍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사춘기 소녀가 등장하는 야릇한 3각관계가 소재다.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에서 그에게 강연이 쇄도했다. 교직을 내려놓고, 전업작가로 나선다.

1945년 <타인의 피>와 희곡 <식충이>를 발표한다. “나는 사랑스런 그의 아내” “일생을 통 털어 진실로 열정적인 첫 관계” 보부아르가 전통적 여성으로 첫 변신을 한다.

1947년 초청 강연으로 미국을 여행할 때다. 그때 넬슨 앨그런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로 미국 출판상을 받은 작가다. 둘은 20년 가깝게 더운 관계를 간헐적으로 이어갔다. 인디애나 ‘밀러 비치’ 오두막에서 둘은 밀어를 속삭였다.

보부아르는 ‘초대받은 여자’ 이후 많은 책들을 썼다. 1954년 <레 만다린>으로 콩쿠르상까지 수상한다. 책은 2차대전 중 나약한 지식인들의 삶을 조명한다. 자신의 연애 경험을 소설로 변형한 것이다. 등장 인물 중 앙리 페롱은 카뮈, 로베르 뒤브르외는 사르트르, 앤 뒤브로외는 자신으로 추정된다. 연인 넬슨 앨그렌과 진한 러브 어페어가 숨은 그림이었다. 1944년 실존적 윤리학 논문인 ‘피루스와 키네아스’를 썼다.

‘애매함의 도덕에 관하여'(1947)는 실존주의 입문서였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그 난해함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진리를 깨우치면 쉽게 설명하는 법인데…’애매성…’은 필자도 소화하지 못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들의 몇 가지 모순을 꿰뚫는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출간과 중국의 붉은혁명은 1949년의 2대혁명이다.”(조성관) ‘제2의 성’은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성적으로 강력한 여성주의의 도래다. 앨그렌은 훗날 보부아르가 자서전에서 자신과의 성적 경험까지 털어놓은 데 분노했다. 그녀의 책을 혹평함으로써 분노를 표출했다. 앨그렌에게 보낸 연애 편지와 시시콜콜한 성적 취향들은 보부아르의 사망 후 공개됐다.

<제2의 성> 중 ‘사실과 신화’의 장이 특히 주목받았다. 남성이 ‘신비함’이라는 거짓 아우라를 주입시켜 여성을 ‘사회적 타자’로 만들었다는 논지다. “남성은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저 변명거리로 농락했다.” “이 잘못된 관념은 상위 계급에서 하위계급으로도 퍼져나갔다.” “인종, 계급, 종교와 같은 다른 영역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성’이야말로 남성이 가부장적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확실한 방편이라는 거다.

<제2의 성>은 출간 1주일만에 2만부가 팔렸다. 여성주의적 실존주의의 시작이었다. 가톨릭계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구역질 난다”(모리악)부터 “남자의 위신을 깎아…”(카뮈)까지. 엄청난 반발과 후폭풍을 부른 것이다. 논란으로 책은 더욱 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년만에 프랑스 미국에서만 100만부를 넘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를 받아들였다.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 ‘정상성’을 흉내 내려 애쓰는 아웃사이더라고 했다. ‘이것이 여성의 성공을 제한한다…’ 그는 “여성들이여 결혼하지 말라!”고 외쳤다. 여성이 ‘가사’의 지옥에 시달리는 걸 지겨워했다. 가부장적 성차별적 여성관을 집요하게 비판했다. “가정일은 목적 없이 지속되는 투쟁”이라 고 했다.

파리국립도서관의 책 속에서 동물학 세포학 생리학 유전학 인류학까지 섭렵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발자크 카프카를 비롯해 프로이드까지… 이들의 저작과 이론도 모두 도마에 올렸다.

“여성은 부드럽고 관용적이면서 침대에선 요부여야…” 이것이야말로 ‘여성다움 신화’의 치부라고 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이 이를 확산시킨 매개체라 질타했다.
“너무나 기묘하고 불순하며 복잡한 그 무엇이라 뭐라고 표현할 수…”(키에르케고르)
“영주(남자)는 가신(여자)을 보호해주고…여자를 ‘타자’로 만든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뿌리깊은 공범의식을 발견한다.”(제2의 성, 프롤로그 중)

제2차대전 후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 등과 <레 탕 모데른>(현대)을 발간한다. 이 좌파 정치잡지에 글을 싣고, 발상을 탐색한다. 둘은 1952년 프랑스 공산당에도 나란히입당한다. 사회주의만이 여성억압을 해소하리라는 부질없음! 1959년 공산혁명 쿠바를 방문, 체 게바라와 인터뷰했다. “체 게바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사르트르) 사망 직전까지 이 잡지의 편집자로 남았을 정도다.

보부아르는 미국 중국을 여행하며 기행들도 냈다. 마오쩌둥을 추종한 마오이스트처럼 굴기도 했다. 1986년 4월 14일, 위스키를 좋아한 보부아르는 간경화가 악화돼 숨을 거둔다. 최종 사망진단은 폐렴으로 처리됐다. 몽파르나스의 사르트르 묘 옆에 묻혔다.

6년 전, 사르트르가 먼저 별이 됐다. 만나되 별거하던, 둘의 첫번째 동거였다. 사후에, 사상가로 보는 시각으로 명성은 드높아졌다. 2006년 그 이름을 딴, 센강 37번째의 인도교가 섰다. 곡선이 특징인 이 다리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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