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산울림’ 김창훈과 ‘모더니즘 시인’ 김경린의 ‘어머니의 하늘’

삼형제 밴드 산울림. 왼쪽부터 김창완 김창익 김창훈. <출처 미디어빌>


정현종의 ‘방문객’ 시작으로 500번째 ‘어머니의 하늘’ 노래로

산울림은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 3형제로 구성된 그룹이다. 대한민국 록밴드로 대중음악계에 굵은 발자취를 남긴 독특한 음악세계를 지닌 피붙이다. 1977년 <산울림 새노래 모음>으로 데뷔했다. 서울대 2명(김창완, 창훈)에 고대 1명(창익)의 드문 가족 밴드라고 할 수 있다.

삼형제는 소시적 주말에 방에 계란판을 붙여 방음실로 꾸몄다. 5000원짜리 싸구려 기타로 자기들이 만든 곡을 신나게 연주했다. 1977년 대학가요제에 삼형제가 ‘무이(無異)’라는 밴드로 나갔다. 당시 김창훈은 샌드페블즈 5기(75학번)였다. 6기(76학번)에게 바톤 타치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자작곡 “나 어떡해”를 샌드페블즈에게 줬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산울림 1집 수록곡)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로 2위를 했다. 김창완이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에 걸렸다. ‘무이’는 결국 탈락, 1회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에게 돌아갔다.
산울림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한국 락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다.

유신 때 긴급조치 9호로 ‘대마초 파동’이 벌어져 락음악은 뿌리가 뽑혔다. 1980년 대 중반 블루스, 하드락, 메탈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수면 위로 오르기까지 10년 간, ‘락 음악의 암흑기’를 대표하는 밴드다.

음악을 하다보면 늘상 누구에겐가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하는 법이다. 산울림은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독특한 음악세계를 지닌 밴드로 평가된다. 전성기를 지나 90년대 후반 탄생한 밴드들이 격세의 후계자로 자처했다. 산울림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훗날 이들을 기리는 헌정 앨범을 냈다.

신중현이 가요계 사상 최초요, 두 번째가 산울림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일본으로까지 전파됐다. 산울림, ‘신중현과 엽전들’의 일본인 판 ‘곱창전골’이 나왔을 정도다. 처음 밴드 할 때부터 작곡에 몰두, 데뷔 때 150여 곡 창작곡이 있었다.

산울림이 레전드로 남게 된 것은 미숙한 실력과 어설픈 장비로 도달한 도저한 파격에 가까운 독창성 때문이었다. 외국 오리지널을 베끼면서 창작은 도외시하고 연주에만 목매던 일부 음악인들에게 산울림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산울림 3집까지 한국판 ‘개러지 록‘(garage Rock) 탄생, 호평을 받았다.

산울림의 초기작은 사실상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음악에도 영향 받지 않았으나 거의 모든 록커들에게 영향을 줘서다. 세 형제 중 가운데인 김창훈은 용산고 서울농대(식품영양학)를 나왔다. 창훈이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 엄혹한 유신 시대였다.

입학 해인 1975년 4월 11일 유신에 항거, 김상진 열사가 할복, 숨을 거뒀다. 김상진 열사는 1968년 서울농대 입학 후 운동권 써클인 ‘한얼’에 가입, 활동했다. 보성고를 나와 군대 제대 후 서울농대 축산과를 다니던 선배가 자결한 거다. 그 사건은 창훈의 심리상태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전설적인 ‘나 어떡해’를 작곡해 후배들이 정상에 오르게 한 김창훈에게 말이다. 김창훈이 환경에 천착하는 노래가사를 쓰고 작곡을 하게 만든 선한 영향력을?

그는 최근 2년간 시에 노래를 입히는 작업을 유튜브로 계속해왔다. 불과 2년 사이에 500곡의 높은 산에 오르기 직전이다. “처음엔 100곡만 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단다. 음식 사업을 하다 보니, 음식에 관한 노래를 만들었단다. 한 70여 곡 하다보니 소재 빈곤에 빠져 중도에 관뒀다. 그리고 시에 노래를 입히는 작업에 몰두했다.

나중에는 참으로 많기도 한 주옥같은 시가 노래를 끌어당겼다. 그래서 2년만에 500곡이라는 고지에 오르게 된 거다. 대중에게는 여전히 문턱이 높은 ‘시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시노래 중 첫번째가 정현종의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 시가 유명해진 건, 광화문 교보문고 현판에 나붙어서다. 지금 작곡을 끝낸 500번째 곡은 김경린의 ‘어머니의 하늘’. 1918년 생인 김경린 시도 압도적인 세련미를 뿜어낸다.  그 시노래를 김창훈이 지난 5월 발표했다. 그가 500고지에 오르는 동안 수많은 시가 노래로 변했다. 한용운의 배와 나그네, 김소월의 봄비, 이육사의 청포도, 이상화의 통곡, 함석헌의 얼굴, 이상의 거울, 이형기의 낙화가 그랬다. 모녀 시인들의 시도 노래로 변했다. 26세로 요절한 김희준 시인(태몽집)과 모친 강재남이 그 주인공이다.

유튜브 ‘어머니의 하늘’ 

500번째 ‘어머니의 하늘’ 김경린은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 시인이다. 와세다대 건축과를 나와 서울대 석사(환경공학)를 딴 건축가이기도 하다. 김경린은 함북 종성에서 1918년 났다. 역시 함북 태생의 고 김규동 시인과 절친으로 같은 시동인도 지냈다.

1918년 출생 김경린 오장환 문익환(왼쪽부터)

1918년은 문학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많이 탄생한 해다. <병든 서울>로 잘 알려진 서정시의 대표주자지만 월북으로 조명되지 못한 오장환과 문익환 목사 등이 이 해에 났다. 장편소설 <역사는 흐른다>를 집필한 한무숙도 났다.

<얄개전>으로 청춘들 사랑을 받았던 조흔파도, 황금찬과 박남수 시인도 같은 해다. 윤동주 시인과 교류한 7권의 시집을 낸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 해도 바로 이 해다. 김경린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20세기와 21세기의 모더니즘을 아우른 시인’이다. 시작 활동 때 조국의 해방을 맞아 자유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민족상잔의 전쟁까지 터졌다. 폐허는 되살아났지만 어느새 팽창이 되고, 일순간 거품이 터져 우리가 알지 못한 흉한 민낯이 드러났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모더니스트’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 김경린이다. 일본을 거쳐 들어온 30년대 모더니즘 사조의 세례를 김기림을 필두로 최재서, 이상, 정지용이 받게 된다.

모더니즘은 서정으로 가득찬 기존의 시와 ‘카프’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문학에 맞서는 새 장르로 주목을 받아왔다. 도시화 초기의 한국에서 ‘도시의 환멸과 불안’을 이야기한 건 뭔가 어설퍼, 공감을 얻지 못한다. 모더니즘의 생명이 길게 이어지지 못한 한 원인이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실험이 지속되던 1930년대 문학계에서 모더니즘은 대안 중 하나였다.

김경린은 와세다대 건축과에 수학 중 모더니즘계열 문예동인인 ‘VOU’에 조선인 최초로 가입한다. 시인 임수경은 그가 일본으로 가기 전 조선일보에 발표한 시 ‘차창’에서 이미 모더니즘 성향을 보였다고 전한다.

나는
수족관에 온
한 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자신을 ‘수족관의 어족’이라고 한 것은 부자유스런 세계의 불완전한 존재일 뿐임을 표현한 거다. 한글말살로 좌절한 김경린은 유학길에 동경에서 인쇄를 하리란 희망을 가지고 그동안 모아둔 원고를 갖고 간다. 그러나 미군 폭격으로 맡겨 놓은 원고마저 분실하고 마는 불운을 겪는다.

이후 김경린은 귀국 후 1943년 <국민문학>에 시를 발표한다. 일제는 적국 문학이라는 이유로 모더니즘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카프 시인들은 김경린이 ‘하이카라(지식층)임을 질투해 ’징용되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징집영장으로 곤욕을 치뤘지만 기술자 우대에 힘입어 간신히 풀려난다. 그에게 손을 내민 이가 종로에서 ‘마리서사’를 운영하던 시인 박인환이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신시론>을 냈다.

김경린을 좌장으로 박인환, 김병욱, 김경희, 임호권 등이 만든 <신시론>은 ‘구시대 시문학과의 절연’을 내세운다. 서정과 낭만성을 벗어나 새로운 사조의 시를 선보인다. 바로 2차 모더니즘의 중흥기가 개막됐음을 뜻한다. 뒤늦게 <신시론>에 들어온 게 바로 김수영이다. 김수영과 양병식의 합류로 2차 모더니즘의 상징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빛을 본다.

암울한 일제 때 태어나 힘든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항상 가슴 속에는 본능처럼 ‘시’를 화두로 붙들었다. 숨이 지는 순간까지 현대시 발전에 굵은 발자취를 남겠다. 21세기를 연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한 선구자였다. 평생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일관해 온 김경린. 표현의 다양성, 눈부신 이미지, 무의식의 개척 등 업적은 빛났다. 그러나 문단의 무지로 그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김경린에 대한 평가가 뒤늦게나마 활발해진다니 다행이다.

그의 시 두편을 소개한다.

태양이
직각으로 벌어지는
서울의 거리는
프라타나스가 하도 푸르러서
나의 심장마저 염색될까 두려운데

외로운
나의 투영을 깔고
질주하는 군용트럭은
과연 나에게 무엇을 가져왔나

비둘기처럼
그물을 헤치며 지나가는
당신은 나의 과거를 아십니까
그리고
나와 나의 친우들의
미래를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 중 일부)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랏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국제열차는 타자기처럼’ 중 일부)

거리의 군용트럭, 타자기처럼 질주한 국제열차. 그리고 월북해 사라지고, 잃어버린 벗들의 얼굴. 월북으로 떠나 소식 끊긴 김병욱과 젊은 나이 술로 진 박인환, 자유를 부르짖다 버스에 치여 불귀의 객이 된 김수영. 사라지고 변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다가오는 한복판에서 모더니즘의 불씨를 이어간 이가 김경린이다.

박인환(1926~1956), 김수영(1921~1968)과 함께 모더니즘 중추였다. 김경린은 건축과 환경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20세기 특질인 과학기술 발달과 도시집중화에서 오는 불안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미지즘의 방법론을 발전시킨 <포스티즘>에 근거를 두고 그는 시작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가 낸 앤솔로지(Anthology)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었다. 6.25 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으로 많은 피를 흘렸고, 국토는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그 비참함 속에서 생명에 대한 불안을 새삼 새기면서 <후반기>동인을 일으켰다. 환도 후 1957년 <현대의 온도> 등을 하는 동안 이합집산도 참으로 많이 했다.

모더니즘의 발전 과정을 이상, 김기림, 김광균, 장만영 등 1기,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2기, <후반기>를 3기로 봤다. 젊은 세대의 시도를 4기, 성격은 다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각각 나누자고 정리했다. <시집 말미에 남기는 메시지> 중 그를 추모하는 분들이 그의 탄생 100주년 때 “지금 김경린을 왜 생각해야 할까?” 자문자답을 했다.

지금 “왜, 그의 시를 굳이 읽어야 하느냐?”는 게 질문의 핵심이다. 그의 시가 시대에 던지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라는 것이다. 오늘 한국의 젊은 시들에 가장 가까운 게 바로 김경린이란다.
“특히 신춘문예 시가 김경린의 시에 가깝다. 그의 시의 사실적이고 산문적인 현실 묘사, 연상의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이미지와 불연속성의 시어의 나열, 그리고 그 밑에 깔려있는 짙은 인간 냄새 때문이다.”(민용태)

김경린은 1966년부터 휴지기를, 10여년 지나 1978년부터 다시 시를 쓴다. 그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80년대, 시단에는 ‘해체시’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현실세계를 반영한 시에서 나아가 시어의 격과 구성을 파괴한 게 해체시다. ‘시는 언어로만 이루어지며 격이 있어야 한다’는 걸 낡은 생각으로 치부했다. 억압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가녀린 저항이기도 했다. 이 시들은 김경린이 주도한 2차 모더니즘과 비슷하게 궤를 같이 한다.

그와 모더니즘을 같이 한 오랜 벗이 김규동이다. 마침 3.8따라지로 두 사람은 같은 함북 출신이다. 김경린을 500번째 대미(大尾)로 선구한 산울림 김창훈에게 거듭 상찬을 보낸다.

김경린 시인


김경린 시인 연보

1918 함경북도 종성 출생(4월 24일)
1938 경성전기학교 토목과 8회
1939 <조선일보>에 시 ‘차창’(車窓)외 2편으로 등단
1939 ‘맥(脈)후기’ 동인에 참여
1940.3~42.11 와세다대 고공토목과 입학 및 조기 졸업
1941 일본 모더니즘 동인 「VOU」에서 활동
1941년 3월부터 ‘장미의 경기’를 비롯하여 작품 다수 발표
1942 일본에서 귀국(1942.11)
1943 중앙청 도시국 근무하며 <국민문학> 등에 작품발표 했으나 전쟁에 비협조적인 親 英美의 詩라는 지탄 아래 일시 활동 중단
1947 박인환이 중앙청 도시국으로 찾아와 모더니즘 시운동을 함께하자고 제의
1948 ‘신시론’ 동인 구성, <新詩論> 1집(1948.4.20) 발간(김경린, 박인환,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 5인 참여)
1949 신시론 동인지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김경린, 박인환, 임호권, 김수영, 양병식 5인 참여)
1950 ‘후반기’ 동인. 1차(1950년 1월, 김경린, 박인환, 조향, 김차영, 이상노, 이한직)이었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지에서 이상노와 이한직 탈퇴하고 이봉래, 김규동 합류
1955 뉴욕주립대학 단기과정 입학 후 수료(20세기 모더니즘 창시자 에즈라 파운드 조우. 그의 추천으로 미국 현대시인협회 가입
1957 ‘DIAL’ 동인 창립, 사화집 <현대의 온도> 발간(김경린, 박태진, 김차영, 김원태, 이철범, 김호, 이활, 이영일, 김정옥 참여)
한국시인협회 초대 사업간사 역임(회장 없이 간사제도로 출발, 김경린,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와 함께)
1969~1979 새로운 시 방향 모색을 위해 작품 활동 중단.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졸업
1985 시집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 발간
1986 한국신시학회 초대회장 선임
1987 시집 <서울은 야생마처럼> 발간
1988 시집 <그 내일에도 당신은 서울의 불새> 발간
1994 에세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 시집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 발간
2006 작고(3월 30일)
2012 서울 종로구 삼청공원에 김경린 시비 건립

[수상]
1988 제3회 상화시인상
1994 제5회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 예술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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