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군견에 관한 글을 썼다. 전쟁터에서 병사의 생명을 구한 군견도 있었고, 지뢰를 찾아 수많은 목숨을 살린 군견도 있었다. 반면 임무를 마친 뒤 조용히 잊힌 군견들의 이야기도 만났다. 개에 관한 자료를 읽다 보니 오래전부터 외우다시피 했던 <사기>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도척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요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다. 개는 본래 자기 주인이 아닌자에게 짖기 때문이다.”
한신이 죽은 뒤 붙잡혀 온 괴통은 한 고조 유방 앞에서 이 한마디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자신에게는 한신이 주인이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개는 선악을 따져 충성하지 않는다. 주인을 위해 짖고, 주인을 위해 달린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자신을 낮추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말했다. 개와 말처럼 힘을 다해 섬기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 보면 충성을 다한 사람들의 말로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예양은 자신을 알아준 지백(智伯)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라는 그의 말은 지금도 의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신은 충성을 다했음에도 끝내 토사구팽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감춘다.”
권력은 충성을 필요로 하지만, 때로는 충성한 사람을 가장 먼저 버린다. 인간의 역사는 이런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 왔다.
문득 한비자가 떠오른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분석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권력의 모함 속에서 생을 마쳤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조차 권력의 부조리를 피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저서만큼이나 깊은 역설로 남았다.
또 하나의 고사가 있다. 촉견폐일(蜀犬吠日). 안개 많은 촉나라의 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해를 보고 짖었다고 한다. 낯선 것을 두려워해 짖는 것이다. 개는 주인을 따라 짖고, 낯선 해를 보고도 짖는다. 그러나 사람은 때로 은혜를 잊고, 때로는 이익을 따라 등을 돌린다.
군견 이야기를 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개는 과연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만일 개가 인간의 역사를 읽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평생 주인을 위해 달린 사냥개를 삶아 버리는 사람들, 은혜를 입고도 배신하는 사람들, 의리를 말하면서도 이해관계 앞에서 쉽게 마음을 바꾸는 사람들을 보며 오히려 개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개 이야기를 쓰려 했는데, 어느새 개는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있었다. 괴통의 개도, 촉나라의 개도, 토끼를 쫓던 사냥개도 글을 마칠 무렵에는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인간의 품격과 의리라는 오래된 물음뿐이었다.
개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만으로 살지 않는다. 은혜를 기억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은 인간이 선택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인간다움은 재능이나 권세가 아니라,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