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가 들은 사이렌, 그 목소리는 내 안에 있었다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나서 RISS를 검색하다가 프란츠 카프카의 짧은 글 하나를 만났다. 제목은 ‘사이렌의 침묵’이었다. 사이렌이라면 당연히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디세우스가 귀를 기울이고, 선원들은 귀를 막고, 그 치명적인 노래를 피해 지나가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카프카는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사이렌들이 노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오디세우스다. 그는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돛대에 몸을 묶었다. 그런데 정작 사이렌은 침묵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들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질문에서부터 사이렌의 이야기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사이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사이렌은 분명히 노래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부른다. 자신들의 노래를 들으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유혹한다. 오디세우스는 그 노래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선원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한다. 선원들의 귀에는 밀랍을 넣는다. 자신만 들으려 한 것이다.
그는 유혹을 이겨낸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오디세우스는 왜 그렇게까지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아름다운 목소리가 궁금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세상을 돌아다니고, 전쟁을 치르고, 온갖 사람과 괴물을 만나면서도 끝내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사람이다.
사이렌은 그런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을 노래로 붙잡는다.
아름다운 여인은 왜 위험해졌을까
그런데 사이렌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고대 그리스의 사이렌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어와 달랐다. 여성의 얼굴과 상체에 새의 몸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이렌은 점차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인어의 모습과 가까워졌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이미지에서는 두 개의 꼬리를 가진 사이렌도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스타벅스(Starbucks)의 로고에도 두 꼬리를 가진 사이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처음에는 몸 전체가 드러났던 여인이 이제는 얼굴과 머리카락, 그리고 양쪽으로 갈라진 꼬리의 흔적만 남긴 채 우리를 바라본다.
사이렌은 몸도 변했지만, 사실 더 크게 변한 것은 우리가 그녀에게 부여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처음의 사이렌은 노래하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고, 유혹하는 여인이 되었으며, 마침내 우리가 욕망하는 어떤 것의 상징이 되었다.
단테의 사이렌
그 변화의 중간에 단테가 있다. <신곡> ‘연옥편’에서 단테는 꿈속에서 사이렌을 만난다. 처음 그녀는 추하고 기형적인 여인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단테가 바라보자 그녀의 모습은 점차 아름답게 변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자신이 오디세우스까지 유혹했던 사이렌이라고 말한다. 베르길리우스가 그녀의 몸을 드러내자 추한 실체와 악취가 나타나고, 단테는 잠에서 깨어난다.
단테에게 사이렌은 이제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다. 내가 욕망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보고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욕망이 먼저 대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는지도 모른다. 사이렌은 그래서 점점 바깥의 괴물이 아니라 내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괴테에서는 유혹도 삶의 일부가 된다
괴테에 이르면 고대 그리스의 세계는 다시 아름다움을 회복한다. 인간에게 욕망과 아름다움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경험하고 견디고 통과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알아간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사람만은 아니다. 유혹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통과하는 인간이다. 이때 사이렌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존재인 동시에,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주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나면 카프카가 등장한다.
카프카의 사이렌은 노래하지 않는다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은 이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뒤집는다. 사이렌은 침묵한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그 침묵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사이렌이 노래하고 있지만 자신만 그 노래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심지어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침묵을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 가능성까지 남겨둔다. 인간의 이해로는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소리가 없는데도 소리가 존재한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정신의학적인 환청으로 읽을 수는 없다. 카프카가 오디세우스를 정신질환자로 묘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생각하면 묘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할 때, 그 목소리는 정말 언제나 상대방에게서 온 것일까?
혹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두려워하는 말을 상대방이 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혹시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안의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가 되어 들려오는 것은 아닐까.
카프카의 침묵하는 사이렌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안의 여인
여기서 나는 사이렌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사이렌은 바다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평생 만나고 싶었던 여인, 내가 두려워했던 여인, 내가 욕망했던 여인, 내가 상상했던 여인이 내 안에 먼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여인을 밖에서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 안에 있던 어떤 모습을 밖의 사람에게 투영했을 수도 있다.
융(Jung)의 말로 하면 남성의 무의식 속 여성적 형상을 아니마(anima)라고 한다. 반대로 여성의 무의식 속 남성적 형상은 아니무스(animus)다. 굳이 융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이런 경험을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끌린다. 그 사람이 특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사람에게서 내가 보고 싶었던 어떤 모습을 발견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내가 원했던 사랑을 보았고, 미워했던 사람에게서 내가 두려워하던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이렌을 바라보았지만
그렇다면 사이렌은 무엇일까. 내가 바라보는 여인인가, 아니면 그 여인에게 투영된 나 자신의 욕망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호메로스에서 카프카까지의 긴 시간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호메로스의 사이렌은 노래한다. 단테의 사이렌은 욕망을 비춘다. 괴테의 사이렌은 아름다움과 인간의 욕망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카프카의 사이렌은 침묵한다. 그런데도 오디세우스는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사이렌 이야기의 마지막 단계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우리가 사이렌을 두려워했다. 그다음에는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끌렸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끝까지 따라가 보면 질문은 바뀐다.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가 아니라 “나는 왜 그녀에게 그런 마음을 넣어주었을까?”가 되는 것이다.
사이렌은 바다에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도 있고, 욕망 속에도 있고, 사랑과 두려움 속에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때 우리가 듣는 것은 어쩌면 사이렌의 목소리가 아닐 것이다. 오래전부터 내 안에 살고 있던, 이름 없는 한 여인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이렌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