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산책] ‘영성의 길’ 찾던 구도자 길희성 박사

길희성 교수


강화도 고려산 자락의 ‘심도학사’ 만든 종교학자

‘길’을 찾는다. 평생을 종교라는 심연 속에서 길을 찾았다. 마침내 그는 길을 찾았다. 영성의 길을…뛰어난 지성이 귀의하는 영성의 그 좁은 길이다. 높은 길은 넘어가면 된다. 닫힌 길은 열어가면 된다. 없는 길도 만들면 된다.

길희성은 길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갔다. 간절한 마음이 있어, 길을 찾아낸 것이다. 구도자처럼, 때로는 수도승처럼 살다 갔다. 고승이 좌탈 입망에 들듯, 육신을 훌훌 벗어놓고 저 피안의 세계로 표표히 떠나갔다. 평생 더듬이를 세우고 촉을 갈고닦아 탐색하던 ‘길’을 집대성, <영적 휴머니즘>을 펴냈다. 수십년 쪼아, 갈고닦아 구슬을 만들었다. 그것이 900여 쪽에 이른 영성의 결정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육신의 에너지를 쥐어짜냈다. 빼어난 지성과 회통의 지혜까지 쏟아부었다.

고승은 죽을 때를 아는 법이다. 길희성 박사도 그러 했으리라. 책이 나오고, 2년 여 흐른 가을에 그는 갔다. 죽음을 예감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리라. 인류에게 무서운 재앙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기후위기와 팬데믹, 헤게모니 아귀다툼으로. 길희성은 영성의 길을 찾는 심도학사를 만들었다. 12년 전, 교수 정년을 4년이나 남겼을 때다.

귀찮은 허물을 벗는다는 듯 직을 박차버렸다. 그리고 집을 팔아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 고려산 자락에 검박한 심도학사를 마련했다. 올 3월,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 역병으로 중단한 영성강좌도 3년만에 재개한 바 있다.

길 찾은, 길 박사와 필자는 생면부지 사이다. 글이나 전언으로 그의 빼어난 지성, 맑은 기상에 관해 떠듬떠듬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강화도까지는 두 시간 가량 먼길이다. 조광호 신부님 안내로 심도학사로 갔다. 거기서 이명현·최충옥 교수도 마주쳤다. 새길교회 교인 중 한명인 한인섭 교수도 거기서 마주쳐 고인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심도학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철학을 전공한 이주향 교수와도 조우했다.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는 2019년 12월 20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성탄절은 하나님이 예수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온 날”이라고 했다. 인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에서 법복을 입고 걷고 있는 모습. <사진 한국일보 강지원 기자>

심도학사는 교수를 그만둔 이듬해 고인이 사재를 털어 고전강독과 명상을 위해 마련했다. 부활한 영성강좌를 3월~6월까지 4차례 했단다. 두번째만 조광호 신부님의 동검도 채플에서 했다. 첫 강좌는 이진권 목사와 정경일 박사가 맡았다. 그 내용이 흥미롭다.

3~4세기 그리스도인 구도자들이 도시를 떠나 사막에 간 이유를 탐색했다니 말이다. 사막에는 절대 고독이 뱀처럼 똬리를 튼다. 모든 것을 무로,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려는듯 강한 열기와 추위, 바람, 모래가 날린다. 저절로 마음 속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막은 우리가 내면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두 번째 강좌는 조광호 신부님이 종교와 예술이 무엇이 다르고 같은가 강론을 했다. 그리스도교 영성과 침묵의 의미를 더듬어 보려면 세간의 소음과 탐욕, 다툼을 피하는 길은 어디에? 묵언수행으로, 명상으로 마음자리를 보는데 있다.
침묵의 힘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자원이다. 치유와 위로를 담아낼 침잠과 기도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성찰하는 것이다.

심도학사 정원에 마련된 영전의 위패, ‘영성의 휴머니스트’ 두 단어는 세상이 여덟 번 바뀐 후, 세상에 왔다 홀연히 떠난 이, 그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2년 여 전, 한겨레 종교기자 조현이 그를 만났다. 필생의 역저가 나온 직후였던 모양이다.
“(2021년 8월) 6일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 교수는 평생을 씨름해온 종교적 여정을 마치고 정자에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려 900여쪽의 이 책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모든 것을 토해낸 그 심경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으로 석사를,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2년 만에 박차고 나왔다. 과문해선지, 나는 그런 예를 들어보지 못했다.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옮겨 오래 봉직했다. 교수직마저 정년(65세) 한참 전에 벗어버렸다.

고인은 20년 전 학술원에도 이름을 올렸다. 외조부를 비롯, 목사와 장로들이 가문에 많았다. 한완상 교수 등과 평신도 중심의 ‘새길교회’도 세웠다. 그런 궤적보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있다. 고려 때 고승인 보조지눌의 선사상을 연구해 불교를 가르치기도 했다. <보살예수>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같은 종교다원주의 저작도 남겨서다.

한인섭 교수는 고인을 회고하면서 힘줘 말했다.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 제목만 봐도 고인의 비판적 지성과 마음 깊이를 알 수 있다.” 그 책의 제목만 보면, 무척 도발적이다. 하지만 고인은 평생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었다. 새길교회에는 설교하는 목사가 없었다. 주도자 길희성, 한완상 등이 돌아가며 했다. “설교할 때 늘 고개를 숙이고 했다. 준비해온 글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일방적으로 설교하듯 강요하는 어법이 결코 아니었다. 신앙의 본질에 관해 마치 자문하듯 말을 던져 폐부를 찌르곤 했다.”(한인섭)

온화한 선비나 맑은 구도자와 같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독선적인 기독교에 대해선 예언자처럼 매섭게 비판을 가했다. 그래서 보수개신교계에선 그를 반기독교인쯤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길희성이 ‘최후의 작품’인 영적 휴머니즘을 내놓고 기력이 다해 2년 만에 피안으로 떠났다.

그는 목회자 중심의 기독교와 물질만능에 빠진 종교계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왔다. 도덕과 정의, 영성을 잃은 서구문명의 한계도 비판해왔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한계이기도 하다고 선지자처럼 말했다. 길 박사는 ‘세속’에서 ‘영성’의 세계로 성큼 건너가려 했다.

“전통사회의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관습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켜준 계몽주의 이전이나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해 질서를 유지하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토대인 이성과 상식에 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 고착되거나 매달리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며, 자연계를 감싸면서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으로 가자는 것이다.”

‘신앙인, 철학자로 가장 큰 고뇌는 무엇인가?’라는 조현 기자의 물음에 길 교수는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적 신앙과 정통 교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에 반하는 면이 너무 많고 크다는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인간의 지성에 부담을 주거나 상식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종교가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면 안 되나’ 하는 치열한 의문이다.

고인에겐 그런 의문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철학자든 신학자든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내가 아는 서구 사상사를 장식한 위대한 사상가 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영적 휴머니즘’이 그 고뇌에 대한 답일 것이다. 물론 완벽이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길 없는 길’을 찾아가는 심도의 한 이정표다. 고인이 보조국사 지눌과 해월 최시형을 인류 4대 영적 휴머니스트에 포함시킨 데 나는 탄복한다. 예수, 붓다와 함께 말이다. 특히 해월은 경천-경인-경물까지, 만유일체 범아일여의 경지로 확장해나간 선각으로 봤다. 길희성의 해월 상찬은 내 눈을 크게 뜨게 했다.

조광호 신부님은 내게 말했다. “고인에게 한 2~3년 전 무렵부터 인지장애가 오신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심한 파킨슨 증세까지…” 그래도 밤 세워 집필에 매진한 초인의 경지란다. 조 신부님이 장만한 고인의 사진을 담은 무반사 명패를 잠시 들어봤다. 묵직했다. “기적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조광호)

조 신부님은 몇번이고,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느끼고, 아는 것, 그게 바로 영성이다. 이 땅의 최고 종교학자요 영성의 휴머니스트인 고인에게 거듭 경의를 표한다. 고단하셨을 텐데, 하늘에서 안식을 누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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