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박영철 미디어빌 대표, ‘봄날은 간다’ 어머니께 불러드리려 그리 서둘러 가오?”

고 박영철 기자가 남기고 간 <미디어빌> 홈페이지

그가 떠났다. 청운의 꿈을 안고, 관악에서 젊음을 보냈다. 나와 7~8년을 고교와 대학에서 동고동락을 했다. 그리고 언론밥까지 서로 조선과 동아에서 했으니, 참 길고 질긴 인연이었다. 앵기는 듯한 말투로, 생긴 것과는 다르게 놀았다. 막걸리를 둘이 마시며 봉천동 고갯길을 오르다가 내가 먼저 한 곡을 뽑았다. 운동권 노래가 식상해졌을 때였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를 구성지게 불러 제꼈다. 그게 영철에겐 좋았던 모양이다. 생전에 몇번이고 “영훈 형이 우리 모친의 18번을…” 되뇌곤 했다.

내가 오랜 침잠에서 깨어나 뭔가 나라를 위해 실천하려 할 때 박영철은 이미  뜻한 바 있어 <미디어빌>을 창간했다.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경제부 등을 거쳐 주간조선으로 옮겨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등을 전문성 있게 보도해 매체의 성가를 높였다. 이어 조선이코노미 편집장을 거쳐 시사저널 편집국장으로 스카웃됐다. 또 여성경제신문 발행인 등으로 5~6년 지낸 뒤 미디어빌을 창간해 운영해 왔다.

그에게 나는 글 재능기부를 1년 9개월쯤 했다. 세어 보니, ‘최영훈의 주충우돌’과 ‘단디도사의 페북읽기’, ‘목불인견’, ‘산베고 누운 구름’, ‘와운의 아침 단상’까지… 나라를 위해 단단한 각오로 시작한 집필 작업들이다. 

세어보니 1603편이다. 길기도 긴 그 글들을 일일이 받아줬다. 때로 사진 챙기고, 한자 변환까지, 교열도 했다. 열흘 전부터, 매일 보낸 YS 관련 글이 게재되지 못했다.

병고의 박영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글을 싣길 학수고대했건만… 몇 편 재고가 쌓이기 시작할 때, 카톡으로 답이 왔다. “힘들 게 처리했습니다”라고. 그게 일주일 전이다. 그 후에도 제발 다시 일어나라며 주문과 함께 10여편을 더 보냈다.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 기적의 부적으로 여겼다. 아니었다. 어제, 그는 하늘의 별이 됐다.

                        고 박영철 대표

이제 그는 가고 없다. 그의 아호에는 겸손할 겸이 들어있다. 늘 목소리를 낮추고, 살피며 진중하려 했다. 장부로 태어나서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낫게 만들려고 마음을 먹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하게 만들려고도…

43년 전, 관악에서 그를 처음 봤다. 촌놈이 기가 있었다. 고개 숙이지 않았다. 뭐라 해도, 싱긋 웃으며 한 귀로 흘리는 배포가 있었다. ‘뭐 이런 시건방진 놈이 다 있나?’ ‘천하의 거빈 최영훈에게 말이다’라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 후배 중에 이런 놈이 한 놈은 있어야지… 나와 비슷한 과였다. 요즘 말로는 코든가?

그렇게 인간 박영철과 나는 40년 지기로 살았다. 그 연으로 천재이야기를 시리즈로 낸 조성관과 만났다.

천재를 팔며 사는 조성관의 목이 어제 매여 “어떻게 이런 황망한 일이…”를 반복했다. “어떻게 이렇게 황망한…선배는 아셨나요?”라고 말이다.

박영철은 한중일 세나라뿐 아니라 우리 동이족, 대한국에 관한 글도 쓰고 싶었으리라. 가야할 때가 됐으니 가는 법이다! 떠나는 박영철, 그 뒷모습은 나쁘지 않다.

동무, 잘 가시게! 영철아, 친구야! 꿈은 채 이루지 못했어도, 왔던 곳으로 돌아가 편히 안식하소서… 나도 후~제 영철이 있는 거기로 가 막걸리 한잔 들이키며 회포를 푸세!

그는 동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까지 나를 닮았다. 글 문패도 ‘박영철의 동아시아이야기’였다. 경남고 동문회보에도 그런 칼럼을 다수 남겼다. 그는 갔지만, 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단풍나무 숲 사이로 홀연 그는 떠나버렸다. 그는 갔지만, 나를 그를 보내지 아니하련다.

그가 남긴 글 하나를 소개한다.

‘조슈와 사쓰마는 일본의 영호남’

메이지유신의 주역이면서 사사건건 대립

대한민국 최대 문제의 하나로 지역감정이 거론된다. 4·15 총선의 결과는 지역감정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역감정이 큰 문제인 건 맞지만 시야를 해외로 돌려보면 그리 절망할 일도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라마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에도 라이벌 지역이 있다. 간사이(關西)와 간토(關東)는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니 길게 논하지 않겠다. 한국에 알려진 ‘겉다르고 속다르다’는 식의 부정적인 이미지의 일본인은 주로 간토쪽이 많다는 것, 간사이는 한국인과 기질이 비슷하다는 것, 간토의 대표는 도쿄(東京), 간사이의 대표는 오사카(大阪)라는 것 정도만 언급할까 한다.

일본역사에서 과거의 라이벌은 더 흥미롭다. 대표적인 예로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를 들 수 있다. 이들 이름은 모두 에도(江戶)막부 시대 번(藩)의 이름이다. 번은 다이묘(大名, 영주)가 다스리는 반독립 제후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고권력자 쇼군(將軍)이 다스리는 중앙정부인 막부와 번을 합쳐서 막번(幕藩)체제라고 한다.

사쓰마는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현과, 조슈는 야마구치(山口)현과 대부분 영역이 겹친다. 가고시마는 규슈(九州)에, 야마구치는 일본 본토를 뜻하는 혼슈(本州)에 있다. 사쓰마와 조슈는 에도막부 말기 양대 유한(雄藩, 세력이 큰 번이라는 뜻)에 속했다. 일본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던 메이지(明治)유신은 두 지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 번은 라이벌 의식이 강해 좀처럼 힘을 합치지 못했다. 이를 보다 못한 도사(土佐)번(현재의 고치高知현) 출신의 무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두 번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동맹을 맺을 것을 종용해 성사시킨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삿쵸(薩長)동맹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1868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이들 두 번은 우리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쓰마는 임진왜란 때 남원을 공략해 도공을 대거 잡아갔다. 이 중 한 명이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심수관(沈壽官)이다. 사쓰마는 용맹함과 잔인함이 일본 으뜸이어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가장 괴롭힌 존재이기도 하다. 조슈는 메이지유신 전후에 자주 제기됐던 정한론(征韓論)의 본거지다.

두 번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했다. 메이지유신 후 사쓰마벌(閥·패거리)은 해군을, 조슈벌은 육군을 각각 장악했다. 메이지유신 전에는 사쓰마의 힘이 더 컸으나, 메이지유신 후에는 일본 군부가 육군 위주로 움직이면서 육군을 장악한 조슈가 득세하게 된다. 이들의 경쟁의식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두 지역 출신은 대장(大將) 발음도 달리 썼다. 대장의 일본 한자발음은 원래 타이쇼(たいしょう)가 표준발음이지만, 2차대전 때까지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한쪽이 ‘타이쇼’라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다이쇼(だいしょう)’라는 변칙 발음을 썼다. 우스갯소리로 2차대전 당시 일본의 패망 원인을 육군과 해군의 대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해외 진출과 관련, 조슈벌은 ‘북방 진출론’을, 사쓰마벌은 ‘남방 진출론’을 주장하며 사사건건 맞섰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은 메이지유신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조슈는 총리만 해도 9명이나 되는데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등이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이곳 출신이다. 사쓰마 출신으로는 메이지유신 3대 주역 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초기 메이지 정부의 최고실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러·일전쟁 당시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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