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이어령] 88올림픽 굴렁쇠소년·’흙속에 저 바람속에’·’축소지향의 일본인’·’디지로그’로 남다

“군중이 아니지. 주먹 쥔 어른들의 시위가 아니지. 지구의 모든 사람의 기억과 잃어버린 시간 속에 나타난 생명이에요. 더 설명하면 정적은 깨지고 굴렁쇠는 그냥 자전거 바퀴에 불과해. 눈부셔 잠시 환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순간으로 그 정적을 재현한 것뿐이에요.”(본문 가운데> 사진은 88올림픽 개막식 당시 7살의 굴렁쇠 소년 윤태웅군. 윤군은 배우로 활동중이다. 


‘정적’으로 세계를 감동시킨 굴렁쇠 소년 88올림픽 기획

[아시아엔=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어릴 때 한번쯤 굴리며 우물가 동네 마당에서 놀았던 추억이 누구나 있을 거다. 1988년 서울올림픽 잠실 주경기장, 태권도 연무 장면이 펼쳐지다 끝났다.

우리 사회를 에워싼 이념, 빈부, 분단의 벽을 부수려는 뜻을 담은 퍼포먼스였다. 그 담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새싹이 튼다. 그 틈 사이 필름이 끊긴 영사막의 공백처럼 빈 공간이 나온다. 초록색 잔디 위로는 햇빛이 꽂히고 정적이 잠시 흐른다.

거기로 하얀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어린 아이 윤태웅이 굴렁쇠를 굴리며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간다. 세계를 감동에 빠뜨린 굴렁쇠 퍼포먼스였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한 고 이어령의 회고.

“군중이 아니지. 주먹 쥔 어른들의 시위가 아니지. 지구의 모든 사람의 기억과 잃어버린 시간 속에 나타난 생명이에요. 더 설명하면 정적은 깨지고 굴렁쇠는 그냥 자전거 바퀴에 불과해. 눈부셔 잠시 환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순간으로 그 정적을 재현한 것뿐이에요.”

김재순 전 국회의장 회고담에도 88올림픽 이야기가 나온다. “이어령 선생이 아니면 한 소년의 움직임만으로 어찌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답게 물리적 힘이 아니라 오히려 정적으로 세계를 정복한 위대한 순간이었지요.”

굴렁쇠 퍼포먼스에 대해 생전에 이어령은 겸손한 자세였지만 나름 자부심도 은연중 내비쳤다. “…지금 목청이 큰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잖아. 소음이나 폭탄 터지는 소리보다는 정적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세계인들에게 보여주려 했지…”

한 시인은 굴렁쇠 퍼포먼스에 대해 종이 아닌 잔디밭에 쓴 ‘일행시’라고 평했다.

고인의 생전 회고.

“베니스 비엔날레의 심사위원장을 지낸 저명한 미술평론가는 ‘서울올림픽 중계방송 할 때마다 굴렁쇠 장면이 타이틀로 나왔다’고 하더군. ‘스펙터클한 눈요기를 시켜주는 행사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 행위예술이었다’고.”

고인은 “내 아이디어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내 아이디어가 아니라, 우리 조상님들 작품이다”라고 했다.

“당신들은 캔버스 전체를 꽉 채워서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화가의 사인을 그림 위에 하지. 우리 선조들은 비단 폭에 선 하나 긋고 매화꽃 몇 송이 그려넣는다. 공백이 많아 시도 써넣고 낙관도 찍는다. 옛사람들이 한 대로 한 거다. 초록색 잔디 위에 붓이 아니라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의 움직임으로 그린 거지.”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천재였던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9세. 고인은 2017년 암 발병 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해왔다.
생전에 나는 고인과 이런 저런 연을 맺었다. 그에 대해서 칼럼도 두어번 썼다. 작년 10월께 고인을 인터뷰하러 갔으나 위중한 상태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모습에 그만…

당시 고인을 만나 담소한 사연을 ‘주충우돌’에 한편의 글로 남긴 바 있다.

고인을 모신 전 문광부 신현웅 차관이 올해 벽두에 고인이 불러 자택을 방문했다고 한다. 얼마 전 만난 신 차관은 “이어령 장관이 이번 겨울을 넘기시기 힘들게 보이더라”고 전했다. 이에 선생을 뵈러 가야지 하다 겨울이 끝나가는 바람에 ‘괜찮으시겠지…’라고 내심 생각했다.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뵈러 갔었다면, 위중한 상태로 얼굴을 뵐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안타까움이 덜했을 텐데…

1933년 충남 아산 생인 고인은 문학평론가와 대학교수, 언론인, 시인, 수필가, 기호학자로 활동했다. 우리 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 중 한명에 꼽힌다. 나는 그를 천재로 여긴다. 노태우 정부 때 문화부 초대 장관(1990~1991)을 지냈고, 예술원 회원을 역임한 문화계 거목이다.

대학을 졸업하던 1956년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에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단 원로들의 허위의식을 우상이라는 상징어에 빗대 통렬하게 질타했다. 그의 글은 문단과 지성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스물셋 청년이던 고인은 이 글에서 주류 문단의 권위의식과 가식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문학의 시대정신을 살펴 저항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해 반향이 컸다.

문단의 거두 김동리, 조향, 이무영을 ‘미몽(迷夢)’, ‘사기사(詐欺師)’, ‘우매(愚昧)’의 우상이라고 직격했다.

이어령 젊은시절

이 글로 그는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세대의 이론적 기수로 일약 떠올랐다. ‘우상의 파괴’ 이후 고인은 당시 한국 언론이 탐내는 스타 칼럼니스트로 떠올랐다. 1960년 서울신문, 이후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논설위원을 거쳤다. 고인이 논설위원으로 처음 발탁될 때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1968년 시인 김수영과 문학의 현실 참여를 놓고 ‘불온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어령 선생은 경향신문에선 주요한(1900~1979)에 이어 칼럼 ‘여적’을 맡아 집필했다. ‘여적’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 독재를 통렬하게 비판해 경향신문 폐간의 도화선이 됐다. 주요한에 이어 여적의 필자인 고인은 정권에 비판적인 논조를 지켰다. ‘여적’의 글들로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위협을 받으며 취조받기도 했다.

훗날 고인은 “여적을 쓰던 기간이 가장 화려하고 보람있던 황금기”라고 회고했다. 1973년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비롯해 콘스탄틴 게오르규, 가브리엘 마르셀 등 세계적 작가들을 인터뷰했다.

1966년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국어국문학과 교수와 석좌교수,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고인은 수십 권의 책을 집필한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저술가였다. 

흙속에 저 바람속에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초기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문화를 분석했다. 울음과 굶주림, 윷놀이, 돌담, 하얀 옷, ‘끼리끼리’ 등 일상의 소재로 문화의 본질과 정서의 심층을 파고들었다

‘한국 문화론’의 기념비적 저작이란 호평을 받은 책은 출간 1년 만에 30만부, 누적 250만부가 팔린 바 있다. 해외에서도 번역본이 나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인은 이 책으로 ‘언어의 마술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987년 월간 한국문학에 연재하며 쓴 장편소설 <둥지 속의 날개> 등 다수의 문학 작품도 남겼다. 배경은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1980년대, 인간의 내면을 다루며 문명 비평적 요소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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