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이승만 연구가 역사학자 유영익

2013년 국사편찬위원장 시절 유영익 교수

이화장 10만여 문건 정리, 우남 연구에 심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인 저술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우남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다”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독립을 얻을 수 있었겠나. 우남이 미국 여론을 바꿔놓는 외교와 홍보를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 1943년 카이로선언이 나왔다.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발표가 나온 것이다.”(10년 전 인터뷰)

연세대와 한동대 석좌교수를 지낸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7월 26일 밤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현대사 연구자인 그는 10만건이 넘는 이화장 문서를 정리했다. 연세대에 현대한국학연구소를 설립, 건국 대통령 이승만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유영익은 우남이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세운 공적을 “교육 현장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통탄하곤 했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1960년대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하버드대에서 1972년 갑오경장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서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을 읽고 큰 충격을 받는다.

고인 역시 독재자로만 여겼던 우남의 탁월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국제정세에 밝았던 우남은 쑨원이나 후쿠자와 유키치를 능가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배운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거꾸로 ‘약소국 자결론’을 가르치듯 역설했다. 민족의 활로를 미국 조야에 소신있게 제시한 거다. 한림대 대학원장 재직 때, 1993년 이화장에서 방대한 이승만의 일기와 편지·사진 등을 접했다. 현대사의 핵심을 파헤치는 보석같은 자료라고 판단했다.

우남사료연구소를 차리고 즉각 정리 작업에 착수한다. 한문과 영어에 모두 능통하지 않고선 감당하기조차 힘든 지난한 과제였다. 체계적인 연구와 번역·출판을 위해 촌음을 아끼며 노력했다. 그의 의지로 1997년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가 개설된다. 초대 소장 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를 맡는다. 이화장의 10만건 넘는 문서들은 이 연구소로 옮겨졌다. “작업량에 비해 예산이 부족했고 연구원 한 명 말고는 추가인력을 고용할 수 없어 매일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작업을 했다.”

그가 소장을 그만둔 뒤, 2011년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분리된 이승만연구원이 출범했다. 2019년 이후 <우남 이승만 전집>도 속속 발간됐다. 문서를 근거로 학계의 이승만 재평가를 이끌었다. 우남을 헐뜯는 사관과 논리로 맞서 싸웠다. <이승만의 삶과 꿈>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등 저서도 냈다. 우남이 임시정부 대통령, 주미외교위원장으로 펼친 외교·선전 활동이 결국 독립의 바탕이었음을 논증했다. 건국 대통령으로서 세운 공도 정리했다.

유영익 교수와 그의 저서 <건국대통령 이승만>

한미동맹의 근간인 상호방위조약 체결, 미국식 대통령제, 농지개혁, 63만명 상비군 육성, 반상제도 근절과 남녀평등으로 대한민국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공산세력에 맞서 건국을 한 게 돋보인다. 우남은 자신을 도운 임영신을 미국에 보내 건국을 위한 외교를 펼치게 한다. 임영신은 건국 로드맵인 ‘정읍선언’을 영문으로 작성, UN 로비에 나섰다. 친분이 깊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가 그에게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한다. 

미소가 흥정하는 한반도의 정세를 돌파하는 전략, 즉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로 북한에서 소련을 몰아내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는 구상이었다. 이승만의 ‘건국 독트린’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세계 공론’에 호소, 과도정부가 먼저 UN의 승인을 받는다. 그리고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전략이었다. ‘국제 승인’은 국제법학자인 우남 이승만의 오래된 원칙이다.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늙은 반탁세력”으로 여겼다. 건국 과정에서 우왕좌왕한 미군정을 용의주도한 스탈린의 소련은 공깃돌처럼 갖고 놀았다. 중도적인 김규식과 여운영으로 ‘좌우합작위’까지 출범시키는 등 파란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 곡절들을 겪은 뒤 38선 이남에 단독정부가 서게 된다. 우남의 선견이 없었다면 오늘날 번영의 대한민국도 없었다. 그러니 우남의 공과를 따지면 최소 ‘공7 과3’이라고 말했다.

“현대사 연구를 게을리한 역사학계에 한국사회 이데올로기 분열의 책임이 있다”는 고인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유영익은 “학자들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현대사 연구를 제대로 해왔다면 엉터리 선전·선동이 역사로 둔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미국 휴스턴대 부교수와 고려대 교수, 한림대 부총장, 역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옥조근정훈장, 성곡학술문화상, 경암학술상 등을 받았다. 유족은 아들 승덕(주일 미대사관 상무관)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 이대서울병원에 29일 마련된다. 발인 31일. 우남 재평가에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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