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 칠성파 두목 이강환 숨져…”그래도 명복은 빈다”
조폭 ‘칠성파’ 두목이 하늘로 갔다. 국내 최대 조폭 두목 이강환(82)씨가 부산 남구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2006년부터 뇌경색을 앓으며 거동이 불편했다. 부산서 열린 팔순 잔치 때도 휠체어 신세를 졌다. 당시 명동의 신상사 등 원로 주먹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지병에도, 흐르는 세월에도 이기지 못했다.
부산 도심에 똬리를 튼 피난민 건달이 주축이었다. 1960~70년대 유흥업소 등 이권에 개입, 부를 거머쥔다. 1980년대 일본 야쿠자와 손잡고 마약 밀수까지 했다. 오사카의 교포 야쿠자 사카우메구미의 가네야마 고사부로와는 형제 간이다. 아니 그와 형제 연을 맺었다는 말이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상경, 전국 조직이 된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 나오는 캐릭터의 실제 인물이다. 6공 말기, ‘범죄와의 전쟁’ 때 구속 수감돼 8년 복역을 비롯해 16년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내내 칠성파의 공식 두목으로 군림했다.
출소 후 나이트클럽 지분 싸움으로 다시 수갑을 찼다. 공격 당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반드시 응징했다. 배신자에게는 잔혹한 린치로 조직의 쓴맛을 보였다. 조폭의 사업화와 세 확대에도 능수능란했다.
온천장 연산동 동삼동 기장으로 프렌차이즈화(化)도 했다. 군소조폭의 흡수와 호남 주먹과 연합, 세를 키웠다. 칠성파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2015년 기준 핵심 현역이 150명, 전체 500명 선. 칠성파의 기원을 더듬어 보자. 1950년대 ‘세븐스타’라는 피난민 주먹 조직이었다. 부산 칠성다방 주변을 거점 삼아 이름이 붙었다. 초대 두목 황홍이 2대 두목 이경섭에게 물려준다. 이경섭이 확대 개편한 조직이 칠성파의 맹아란다.
이경섭에게 70년대 초 조직을 물려받은 뒤 칠성파는 전국 최대의 조폭으로 키웠다. 전두환이 육사 11기지만 정규 1기라고 자부하듯 이강환도 초대 두목 자리를 굳혔다. 주먹이 센 행동대장 출신 두목들과는 류가 달랐다. 머리가 좋고, 자금 관리를 잘 해 두목으로 오른 거다. 머리와 처세로 정치력과 깡다구가 있을 뿐이었다. 시쳇말로 주먹 실력은 별로라고들 평한다. 칠성파는 암적인 존재, 독버섯이었다.
부산 완월동을 비롯한 사창가를 장악하고, 유흥 사업 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70~80년대 야쿠자 및 이황순과 손 잡고 마약에도 손을 댄다. 영화 <마약왕>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이황순과 그를 앞세운 칠성파가 영화의 주 소재다. 칠성파는 두목급이 감옥을 들락날락해 세가 죽었다. 부산 반달들이 이따금 칠성파 유명세를 이용할 뿐이다. 양아치들이 ‘나 칠성파야.’ ‘행동대장이야’ 허세 부린다.
칠성파의 행동대장 중 가장 유명했던 건 추명종이란다. 칼잡이로 이름 난 그는 서교호텔 살인사건으로 쫒기다 ‘조폭 반장’ 안흥진에게 잡혔다. 경찰 수사 때 끝까지 윗선을 안 불었다. 혼자 책임지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밖에 있었다면 두목급에 올랐을 것이다. 목포교도소 수감 중, 2020년 스스로 자진했다.
이강환은 전국 조폭들로 화랑신우회를 결성한다.
자유당 때의 동대문사단과 비슷한 연합조직이다. 부산·경남 조폭이 주축인 전국 조직으로 이강환이 회장이었다. 발족 때 회원 수는 약 500명 선에 이르렀다. 2011년, 이강환은 두목자리를 물려줬다. 후계자에게 ‘회장’ 명칭도 쓰라고 했다. 이후 그는 조직의 상징적 두목으로 남았다. 그러나 존재감과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래본들, 말짱 헛 거다. 삶은 한 조각 구름이다. 바람이 불면 바로 흩어져 버리는 신세다.
짧은 인생, 그러니 복을 짓고 살아야지… 나쁜 업만 쌓으면, 끝이 좋지 않은 법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돌이켜 본다. 악업을 많이 쌓았을 주먹의 파란만장한 행장.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만들며 살아야 한다. 생각한 대로의 삶, 사는대로의 생각, 폴 발레리가 한 말이 폐부를 찌른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악당이라도 고인이 됐으니,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