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주년 광복절…‘약소민족의 해방론’ 이승만과 ‘민족자결주의’ 윌슨

이승만(왼쪽)과 윌슨

우남 이승만의 스승이 우드로 윌슨 제28대 미국 대통령이다. 민족자결주의의 윌슨이 프린스턴대에서 박사를 받은 영민한 우남을 지도한 바 있다. 1912년 7월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 이승만도 참관했다. 당시 전당대회 기념 보자기에는 조선을 뜻하는 태극기도 그려져 있다. 한일병탄으로 나라의 국권을 빼앗겼건만 국기를 그대로 넣어 준 거다.

그 한달 전, 뉴저지주지사 윌슨이 직접 이승만을 자신의 별장으로 불렀다. 미니애폴리스 회의를 마치고 윌슨의 딸 제시를 통해 면담을 신청해서였다. 윌슨을 만난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이 출판한 자신의 박사논문집을 윌슨에게 건넸다. 그때 28대 미국 대통령에 출마한 윌슨은 외교정책과 관련해 우남의 구상을 물었다. 

이승만은 지체 없이 ‘약소민족의 해방론’을 펼쳤다. 당시 우남은 일제에서 벗어나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준비 중이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께서 성명서에 동의서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윌슨은 정중히 거절하며 말했다. “나 개인으로서는 서명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돕고 싶소, 그러나 미국 대통령으로서 그 성명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만, 우리가 함께 일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잖아도 나는 당신의 나라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국가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오.”

이승만이 예상한 대로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우남은 다시 한 번 졸라 보았다. “미국의 현상유지 정책을 떠나서 정의와 인도가 지배하는 세계를 위해 나의 편이 되어주십시오!” “물론이오. 하지만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오. 당신의 갸륵한 뜻은 명심하리다.” 그러면서 윌슨은 지방순회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주면서 덧붙였다. “이 박사, 당신은 나 한사람의 서명만 받으려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로부터 마음의 서명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이 대화는 건국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이 구술하고 시인 서정주가 집필한 <우남 이승만전>에 나온다. 미국 동부를 한바퀴 돌고난 뒤 우남은 다시 윌슨을 찾았다.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고 있던 와중에도 이승만을 초대, 가족 만찬을 함께 했다. 지명대회에서 투표를 거듭하다가 44번째 투표에서 마침내 윌슨이 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때까지 이승만은 윌슨 곁에 머물며 미국 대통령 선거를 몸으로 체험했다. 앞서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일본에서 열흘간 머물렀다. 도쿄에서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도쿄조선YMCA)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을 벌였다.

총무를 맡던 동지 김정식과 ‘가마쿠라 춘령회’에 참석,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기독교적 신앙과 애국적 단합’을 역설, 분열된 조직을 통합하도록 교육한 바 있다. 그 결과 발족된 게 ‘학생복음전도단’이었다.

218명의 유학생들이 통합YMCA회관 건립 모금운동을 벌인다. YMCA 회관에서 3.1운동에 앞서 ‘2.8독립운동’이 선언된 것이다. 도쿄의 유학생들로는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김성수, 안재홍, 최린, 신익희, 조용은, 김병로, 현상윤, 이인, 윤백남, 전영택, 김필례, 장덕수, 주요한 등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이승만을 ‘국제적 인물’로 존경하고 기대한 청년들이 그들이었다. 

그후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한 것은 당시 교민이 5000여명이 살고 있어서였다. 본토에는 고작 1000여명뿐이던 시절이다. 하와이에는 이민 노동자들이 한때 7000명 넘게 있었다. 독립운동에 가장 좋은 곳이라 박용만과 합의해 선택했다. 1913년 2월 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환영인파가 몰렸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친 별세’ 전보를 그제서야 받게 된 것이다. 3개월여 전, 1912년 12월 5일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임종은커녕 석달 뒤에야 부친의 별세 소식을 알게 되는 큰 불효를 저지르게 된 셈이다. 충격이 매우 컸다. 75세 이경선 옹은 아들이 떠난 뒤 며느리와 “한지붕 아래 살수 없다”며 집을 나왔다. 월남 이상재가 YMCA 뒤편에 방을 얻어 주어 병약한 몸을 연명하다가 눈을 감았다. 시신은 지게에 지워져 고향땅 황해도 평산에 묻힌다.

연고자는 박승선이었다. 며느리는 이승만이 도미한 뒤 남편 이름에서 ‘승’과 시아버지의 ‘선’을 따 이름을 지었다.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이승만은 “아버지가 생각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이정식 지음)에 나온다.

하와이 유력지인 ‘호놀룰루 스타 블레틴’은 우남 이승만을 환영하는 기사를 냈다. “오늘날 한국에 이승만 박사보다 더 위대한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인이다.” 당시 신문은 하와이 교회에서 강연회를 연다는 소식까지 전해줬다. 독립운동 기지 하와이에서도 이승만은 윌슨과의 교분을 이어갔다.

1차 세계대전이 마침내 끝난 뒤, 윌슨은 그 유명한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는다. 그때가 바로 3.1운동 직전 무렵이다. 우남은 국내외 청년 지사들에게 국제정세의 변화를 시시각각 알렸다. 일본 유학생들에게 영향이 큰 우남의 교시로 2.8독립선언이 먼저 나온다. 고하 송진우와 인촌 김성수, 근촌 백관수, 설산 장덕수 등은 중앙고보 숙직실에서 3.1운동을 거족적으로 펼칠 모의를 한다. 

역시 하와이 체류 중인 우남의 촉구에 힘입어 거사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 노선 차이로 우남을 분열주의자로 모는 일각의 견해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국내에 전파해 청년 지사들을 움직인 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발자취다. 한쪽 눈만 뜨로 현대사를 보는 옹졸한 역사 해석 독점에 맞서 두 눈으로 보자.

우남의 독립운동 역할 역시 재조명이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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