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조계종 성파 종정 “지나간 거는 제로라”

2021년 늦봄 서운암의 명물 장독대에서 포즈를 취한 성파 스님. 스님은 1980년대부터 버려진 옹기를 모아 된장과 간장을 담갔다. <사진 조선일보 김동환 기자>


옻칠·천연염색·야생화·한지 탐구에 대장경 판각지 탐구까지

소탈·격의 없는 하심…조계종의 최고지도자 법랍 63, 세랍 84

[아시아엔=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2년 전, 제15대 종정에 오른 성파 스님은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으로 선 수행으로 길어올린 견처가 굳건했다. 옻칠과 천연염색, 야생화 사랑에다 16만장 자기에 대장경을 새겨 대장각을 세웠다. 요즘은 한지 연구에 몰입한다. 주석하던 선운암에서 윗쪽 비닐하우스로 옮겨 작업을 한다.

근처 매실나무 밭에는 쑥을 심었다가 요즘 갈아엎고 닥나무를 심었다. 종정예하께서 한지 사랑에 깊이 빠졌다. 그래서 닥나무까지 손수 심고 전통방식으로 종이를 만들려고 작심했다. 일상생활에서 예술혼과 대자유 행을 자유롭게 풀어내신다. 활발발(活潑潑)함을 겸비하셨다는 평을 불교계에서 받는다.

종정 추대 때, 사전원고는 “올라오는 동안 싹 잊어버렸다”며 즉석법문의 파격을 했다. 스님은 올해 대담집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샘터)를 펴냈다. 종정 추대 법회 때, “경험 많다, 아는 것 많다고 생각하지 말고 초발심으로 돌아가자”고 일갈했다. 나이 먹고 연륜을 거듭해도 경험이 많다, 지식이 쌓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나간 거는 제로라. 그래서 항상 지금이 시작이에요.”(본문 가운데) 핸드폰 통화중인 분이 성파 스님. 그 오른쪽이 필자다. 

지난 16일 폭우가 퍼붓는 통도사 비닐하우스에서 일행과 함께 종정예하를 친견했다. 손수 천연으로 물들인 푸른 쪽빛 옷부터 눈에 든다. 무의무봉의 소탈·격의 없음이 한눈에 느껴졌다. 엉뚱하게도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새긴 출생지 얘기부터 꺼낸다. 그는 “고려대장경은 강화가 아닌 남해에서 판각됐다”고 확언했다.

학자들 중에 이미 ‘고려대장경 판각지는 남해’라는 사실을 문헌과 고증 등으로 설한 이가 있긴 하다. 당초 대장경 판각지는 남해일 수밖에 없는데도 강화 선원사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선원사는 고려무신 최우의 원찰이었다.

이조실록 태조 7년에 임금이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기록 때문에 고려대장경이 선원사에서 판각됐다는 오류가 생겼다. 선원사는 대장경 판각이 끝날 무렵인 고종 32년(1245)에 창건됐다. “공민왕 9년(1360) 윤 5월에 왜가 강화를 노략질하면서 선원사와 용장사로 침입해 300여 명을 살육하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해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뤄볼 때, 당시 대장경판이 선원사에 있었다면 무사할 수 없었다는 거다. 남해에는 대장경 판각을 위해서 지방관아를 통솔할 수 있는 고려국 분사가 설치됐던 곳이다. 대장경을 새길 나무를 3도 6군에 걸친 큰 산 지리산에서 베어 겨울에 섬진강을 거쳐 남해로 실어 날랐다. 남해야말로 대장경을 새긴 대장도감이 설치됐던 곳이 맞다는 학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성파 종정예하는 “고려대장경은 최우가 판각을 주도했고, 경남 남해에서 했다”고 단언했다. 그 이유로 진양(진주) 일원이 최충헌 이래 최씨 무신정권의 식읍지였다는 것을 꼽는다. 관련 기록을 종합하면 대장경은 최우의 뜻에 따라 그의 처남 정안이 고종 28년(1241) 이후 남해로 내려가 실제 판각 작업을 주도했다는 설명이다.

<종경록> 권27,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을 근거로 대장경판을 판각한 장소가 남해라고 일부 학자들은 단정한다. 성파 종정스님은 이날 남해 출신의 성각 스님에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려대장경 탄생지를 기리는 사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남해 출신인 하윤수 부산교육감을 부른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 일행에게도 “우중에 이리도 많은 사람이 온 까닭이 대장경 판각지가 남해임을 증언하고 기념사업을 도울 발기인들”이라고 당부했다.

필자가 “어떻게 그리 소상히 확신하시는지요?”라고 외람되게 물었다. 그러자 빙긋 웃으면서 “내가 나무를 남해로 옮겨 거기서 파는 걸 봤다”고 했다. “전생에 보셨군요!”라고 화답할 밖에…그 바람에 오지랖 넓은 필자 역시 “미력하나마 힘써 돕겠습니다”라고 맞장구쳤다.

성파스님이 최근 전통 방식의 한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도 대장경 판각지 탐구와 일맥상통 한다. 목판·금속인쇄에서 모두 세계 최초의 찬란한 우리 역사를 후세에게 알릴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자각하신 거다.

대장경 출생지인 남해를 청소년들이 목판인쇄를 체험하는 문화유산의 성지요 교육장으로 만들라는 당부이기도 했다. 종정예하는 고려대장경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고, 운반하며 건조·보관 과정의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대장경 제작이 끝난 후 목공 및 제반 과정의 기술자들이 통영을 비롯한 남해도서에 자리를 잡았을 거다.

이들이 나무를 다루는 노하우를 전승해 결국 임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군선인 판옥선·반야정선이라 불린 거북선을 만드는데 활용된 것이리라. 대장경 제작 인프라가 몇 백년 뒤 국난 극복에도 쓰였다니, 참 놀랍다.

기실 대장경을 만든 이유 역시 거란과 원의 침공 등 국란 극복을 위해서였다. 혜안이 깊은 성파 스님은 30대 때 당대 선지식으로 불리던 경봉 스님에게 법거량을 했다.

경봉 스님은 그야말로 층층시하의 높은 원로였다. 절집 군기는 세속의 그것보다 훨씬 세다. 법랍의 높낮이에 따라 상하도 엄격하다. 젊은 성파가 경봉 노스님에게 시를 써 보냈다. 선 수행의 안목을 담은 법거량을 해본 것이다. 노스님의 답에는 ‘능문능시(能文能詩)’라 적혔다.

선가의 문법으론 “마음에 막힘이 없다”는 뜻일 거다. 젊은 성파의 견처에 경봉 노스님이 고개를 끄덕인 셈이다. 경봉 스님은 ‘속불혜명(續佛慧命)을 희옹희옹(希?希?)하노라’고 썼다. “부처의 법을 잇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는 뜻이다. 80대 경봉이 30대 성파의 견처를 인가해준 것이다. 훌쩍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성파 스님은 통도사의 방장이 됐다. 드디어 최고봉 종정에까지 오른다.

종정은 “사판이판을 겸했다”는 평이다. 선방의 수좌들처럼 동안거·하안거를 나면서 제방선원으로만 나돌지 않아서다. 서운암 경내 장독대, 유약을 바르지 않은 장독을 수집한 성파 스님은 절집에 내려오는 방식으로 된장과 고추장을 담갔다. “절집도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스님은 통도사 서운암을 중심으로 들꽃 축제와 시화전을 꾸리고 지역민을 초대했다. 650톤에 이른 도자기를 구워 팔만대장경을 제작, 장경각을 세우는 대역사도 마쳤다. “30년 전쯤, (최형우 장관이) 거기에 보태 쓰시라고 교부금 5억원을 내려보냈다.”(최장관 부인 원영일 여사)

성파스님은 그 돈을 다 못썼단다. 통도사 내 박물관 짓는 데 쓰였다. 스님은 1000년이 가도 썩지 않는다는 옻칠로 고려와 조선 불화를 되살려냈다. 그런 예술혼과 대자유행으로 이판과 사판, 그 어느 한쪽에만 방점을 찍지 않았다. 부처님도 그러했을 터다. 부처님은 피나는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그 후에는 팔십 평생 그 깨달음을 세상에 펼치는 일에 주력했다. 성파 스님은 “이판은 진리를 탐구하는 선객들이다. 사판은 집 고치고, 행정하고, 절집 살림살이도 한다. 그럼 이판이 큰가, 사판이 큰가?”라고 되묻곤 했다.

성파 스님의 자문자답. “이사무애(理事無碍)라는 말이 있다. 이치에도 걸림이 없고, 일에도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마음공부하고, 그걸 세상에 펼치는 것도 꼭 마찬가지라는 뜻이리라. 말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이판사판을 겸한 경지다. 공허한 이론만 알고, 사물 이치에 어두우면 헛헛하다. 절간 일이 엉망진창이 된다는 거다.

거꾸로 사물에만 밝고 진리에 어두워도 통도는 힘들다. 말도 제대로 할 줄 알고, 사리에도 환히 밝아야만 한다. 이판·사판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 둘이 아닌 거다. 일맥상통을 하게 되는 도저한 경지를 스님은 걸어갔다. “이판과 사판을 걸림 없이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선사가 된다”(성파 종정)

종정예하의 과거 족적은 종종 상식을 넘는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7000년 전 선사시대의 그림을 되살렸다. 한국 전통의 나전 기법과 옻칠을 사용해 손수 만든 예술작품이었다. 마치 검은 우주의 허공에 빛나는 점점의 별처럼 반구대 암각화를 띄워놓은 듯했다.

그것을 물에 담근 채 서운암 앞에 전시했다. 전문 예술가들도 그 발상과 완성도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스님의 행복론은 명쾌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 중에 무엇이 중요한가?”

성파 스님의 즉답에는 주저함이 없다. “현재!” 현재가 없으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럼에도 현재를 잊고서 중생은 시름한다. 행복도 그렇다. 다들 ‘미래의 행복’만 학수고대한다. 그러다 보면 현재가 수렁에 빠진다. “다음의 행복까지 못 가고 눈을 감는다.”

스님은 ‘외줄타기’를 곧잘 예로 든다. “외줄 타는 사람에게 뭐가 제일 중요하겠나. 자기 발 얹어놓은 바로 그 자리. 거기가 가장 중요하다. 그 자리가 없으면 떨어져 죽으니까. 그게 어디인가? 바로 지금 여기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각자의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스님은 “새가 숲에 있을 때는 극락세계인 줄 모른다. 새장에 갇히면 비로소 ‘저 숲이 극락이었구나!’ 깨닫는다”고도 했다. “극락이 어디 있겠나? 지금 사는 이곳, 앉은 자리가 꽃자리다. 그걸 고통의 바다라고 착각하지 마라! 여기가 극락임을 알면 날마다 좋은 날이 펼쳐지고,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성파 종정

1939년 경남 합천 해인사 인근에서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조봉주. 성파(性坡)는 법명, 법호는 중봉(中峰)이다. 통도사 월하 스님을 은사로 1960년 사미계를, 1970년 구족계를 받았다. 조계종 사회부장, 교무부장, 규정부장을 역임했다. 1981년 3월 통도사 제20대 주지로 취임해 교구본사 및 지역발전에 진력했다. 통도사 주지를 마친 후 통도사 서운암 감원으로 주석해 수행에 매진했다.

2000년 4월 통도사 서운암에 무위선원을 개원한 후 선농일치를 선양했다. 통도사에 차밭을 재건했다. 감나무밭을 일구고 야생화도 심는다. 2002년 2월 노천당 월하 대종사로부터 중봉 법호를 받았다. 28년간 도자기를 구워 도자 삼천불과 16만 도자대장경을 조성하고 이를 모시기 위해 장경각을 세웠다. 전통 불교문화 계승으로 천연염색 및 옻칠기법을 개발해 단청과 건축, 발우, 탱화, 건칠불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응용했다. 2013년 4월 조계종 원로의원이 됐다. 2014년 최고 품계인 대종사에 오른다. 2018년 산중총회에서 방장에 추대된다. 2021년 12월 15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2022년 3월 26일 종정 임기를 시작해 종단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후학들을 지도한다.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침범해요(心隙魔侵). 틈이 무엇인고 하니 분열이라.”

성파 스님은 우리 사회에 죽비를 내린다. “정치권도 국민도 조금의 양보도 없이 자기만 옳다 우기며 싸우고 있다”고 했다. 이어 “맹수들이 사방에서 노리는 지금 정신을 바짝 차려도 모자란데 갈수록 분열만 깊어져 걱정이다”라고도 했다.

옻칠과 16만 도자를 구워 만든 대장경으로 이름 났다. 장독 5000개를 모아 전통 방식으로 된장 간장을 담았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인 성파 스님은, 정치나 시국에 관해서는 “아는 바 없다”며 말을 삼간다.

종정 추대 때, 사전원고는 “올라오는 동안 싹 잊어버렸다”며 즉석법문의 파격을 했다. 스님은 올해 대담집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샘터)를 펴냈다. 종정 추대 법회 때, “경험 많다, 아는 것 많다고 생각하지 말고 초발심으로 돌아가자”고 일갈했다. 나이 먹고 연륜을 거듭해도 경험이 많다, 지식이 쌓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나간 거는 제로라. 그래서 항상 지금이 시작이에요.”

종정의 임기는 5년,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조계종의 최고 정신적 지도자다. 선승 출신 효봉, 성철, 청담 스님도 종정을 역임했다. 부처님 오신 날과 동·하안거 때 내놓는 종정 법어는 세간의 관심이다. 스님들에게 계를 수여하는 전계대화상 위촉권, 포상·사면 권한이 있다.

곁에서 본 종정예하의 손은 두툼했다. 팔뚝 여기 저기 화상인듯, 반점들이 보인다. 막일을 서슴치 않은 ‘일꾼의 거친 손’이었다. 존엄한 종정예하의 손과 팔뚝에 옻이 오르고 가마에 불 때다 데인 자국이라니!

“자연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시도,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이지요. 일도, 공부도 마찬가지라.” 쉬거나 끊어짐이 있으면, 용맹정진이 안 된다는 선승의 외침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