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류춘수 설계 정선 ‘파크로쉬’ 체험기

정선 파크로쉬


쉼·편안함 추구 자연친화 명품호텔, 요가명상 테라피

가리왕산 알파인스키장 보이게 날개 한쪽 슬라이딩
시·공 맞춤형, 한국적 감수성 살린 상암동월드컵경기장

‘등산(登山) 아닌 입산(入山)’ 오르는 게 아니라, 산에 들어가는 거다. 정복하는 게 아니라, 산에 맞추는 거다. ‘수시중처’(隋時中處) 건축가 류춘수의 건축 철학이다. 설계할 때마다 늘 되뇌곤 한다. 시공에 맞춤하게 설계하려는 거다. 사람과 사물의 동선에도 집중한다. 고객 편리·수요와 조화를 꾀한다.

정선의 호텔 파크로쉬(Park Roche)에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의 혼이 깃들어 있다. 그의 건축철학 에스프리가 담긴 건축물 중 하나라는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딸 이방카도 평창올림픽 때 이곳에서 묵었다. 호텔 설계자인 그는 이방카가 잔 침대에 누워봤다. 그의 객적은 흰소리 한토막. “이방카가 누운 곳에 누웠다. 아뿔사! Same place, different time!” 수준높은 조크도 구사한다.

파크로쉬(Park Roche)’ 전경. <HDC리조트 제공>

8월 16일, 호텔에 머물며 팔자에 없는 호캉스도 즐겼다. 파크로쉬는 현대산업개발 소유의 웰니스 리조트다. 가리왕산의 산세에 맞춤하게 날개 형상으로 지었다. 그는 자연에 순응하는 조화로운 설계를 지향한다. 알파인 스키장을 가리지 않도록 건물 한 면을 슬라이딩 하듯 깎아냈다. 진부에서 정선까지 오대천이 흐르는 절경은 관동별곡에도 길게 나온다. “가리왕산 두타산에 싸이고, 오대천이 흐르는 장소에 건축물을 설계하게 된 것은 영광”(류춘수)이란다.

영국 아티스트 리차드 우즈가 정선의 자연을 감각적인 색채와 패턴으로 그려냈다. 산과 자작나무 나뭇잎 바위를 비롯한 정선의 자연이 모티브였다. 세월의 변화를 묵묵히 견뎌온 돌의 순수를 포착했다. 그 돌들을 객실에서 볼 수 있다. 거장 류춘수는 객실 어디에서건 마운틴뷰를 볼 수 있게 꾸몄다. 웅장한 가리왕산과 천혜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웰니스(Wellness)’다.

류춘수와 리차드 우즈, 박찬우의 콜라보레이션이 건물과 공간에 기품을 더한다. 요가·명상·테라피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쉼과 비움을 제공한다.

‘로쉬(Roche)’는 프랑스어로 바위다. 이름에 크고 묵직한 바위가 들어있다. 호텔이 위치한 ‘숙암’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흥미롭다. 맥국의 갈왕이 바위를 베고 숙면을 취했다는 데서 왔다. 파크로쉬는 고객들에게 쉼의 기본인 ‘숙면’을 강조한다. 인테리어에도 전통적 문양을 썼다. 한지와 격자의 문양이 곳곳에 있다. 보면 뭔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다. ‘철저한 쉼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호텔 모토에도 걸맞다. 자연 속에서 진정한 쉼을 고객에게 보여 주겠다는 뜻이다.

푸른 산, 안개 낀 능선과 붉게 물든 노을들까지 보여준다.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에는 쉼이 없다. 초월한 듯 살아도, 이면에 명예나 권력, 재물 욕이 숨어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휘둘리며 우리는 산다.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그것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삶이다. ​비우고, 내려놓아야 보이는 법이다. 쉼은 비움은 욕망의 크기도 줄여준다. 파크로쉬는 늘 바위처럼 말없이 ‘고요’하다. 객실에 숙면을 방해하는 커피 따위는 없다. 대신 숙면에 도움이 될 녹차나 레몬차를 둔다. 눈부심을 느끼지 않도록 조명은 차분하다. 아침에 깨어나 불을 켜면 천천히 밝아온다.

오너 정몽규 HDC회장의 건축 디자인 안목도 높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탐독한 책 중 하나가 라이언 홀리데이의 <스틸니스>(Stillness). 내면의 고요를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을지 집중한다. 명품의 탄생 배경이 짐작된다.

지하2층~지상12층, 총 204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동안 지원숙소로 활용됐다. 몇년 전, 문체부 선정 웰니스 관광지로 이 호텔이 뽑혔다. 올해, 아시아 최고의 웰니스 리조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젊은 전문직업인들에게 파크로쉬의 인기는 드높다.

호텔의 총괄 설계자 류춘수는 ‘건축의 세계화’에 앞장서 왔다. 한국의 미를 누구보다 잘 살린, 가장 한국적 건축가로서 말이다. 그가 추구하는 한국적 건축의 특성과 장점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설계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바로 한국적 감수성과주변과의 어울림, 고객 편리 등이다.

                                         상암 월드컵경기장 

월드컵경기장 디자인은 방패연이 한지를 당기는 걸 형상화했다. 하이난 868타워는 김시습의 시에 깃든 노자의 철학이 모티브였다. 이공건축 대표인 그는 영국 왕실의 THE DUKE EDINBURGH FELLOWSHIP과 미국 Honorary Fellows of AIA도 받았다. 공간의 고 김수근 선생 문하에서 건축과 설계 전반을 익혔다.

2002년 서울월드컵경기장 개관식에 참석했을 때의 서글픈 회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축사에서 훌륭한 경기장을 지은 사람으로 시장, 축구협회 회장, 시공사 사장만 거론하더라. 그때 VIP석에서 맛본 참담함과 모멸감은…” 그는 명함에 ‘건축사’ ‘사’를 ‘선비 士’가 아닌 ‘스승 師’로 적는다. 척박한 건축문화의 현주소에 나름의 도발을 감행하는 거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은 빼어난 디자인 외 수익성도 뛰어나다. 매년 100억 흑자로, 5년 전 건축비(2000억)를 회수했다. 스탠드 하부에 수익시설을 넣는 설계로 황금알을 낳은 거다. 지금도 세계최고 수준의 수익을 내는 유일무이한 구장이다.

<월드사커>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축구경기장에도 뽑혔다. 바르셀로나의 캄프누, 암스테르담 아레나,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파리 프랑스 스타디움 등. 상암동 월드컵경기장도 이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방패연 외 소반, 팔각모반, 황포돛배 등 전통 이미지도 넣었다. 한강변과 어울리게 디자인해 건축계의 호평을 받았다.

경기장 내 설계자를 기념하는 스케치와 도면, 사진, 모형이 전시된 공간도 있다. 해외에선 흔하지만 국내는 극히 드물다. 파크로쉬 1층과 객실 TV의 홍보영상에도 설계자 류춘수는 등장한다. 준공식 때 설계자가 초대도 못 받거나, 앉을 자리조차 없는 푸대접이 당최 말이 되나?

건축가를 홀대하는 우리의 현주소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니 이웃 일본이 ‘건축의 노벨상’ 프리처커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했는 데도 우리는 아직 근처에도 못 갔다. 세계 건축계는 가장 전통적인 걸 상찬하는 조류인데…그는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공과 생전에 연이 깊었다. 그의 초대로 윈저궁도 방문했다.

그런 류춘수가 생전에 프리처커상을 받는 쾌거는 없을까? 역경을 딛고 일어나, 파도를 거스르며 노를 젓는다. ‘순풍에 돛 단 듯’과는 거꾸로다. 역풍을 이겨내면 배는 바다 위를 미끌어져 내린다.

류춘수의 건축세계·건축혼 또한 그러길 빈다.

프리처커상

프리츠커상’은 프리츠커 가문이 운영한다. 하얏트재단에서 건축예술을 통해 재능과 비전, 책임성을 보여준 건축가를 선정한다. 사람과 건축환경에 일관된 기여를 한 생존 건축가에게 수여한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려,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상이다.

1979년 미국인 사업가 제이 프리츠커와 아내 신디가 만들었다.
시상식은 매년 5월 건축사에 남을 명소에서 개최된다. 10만 달러와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청동메달을 준다. 미국은 8회, 일본 7회, 영국 5회, 프랑스 3회, 스페인 2회, 독일 2회. 12개 국가에서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한국은 왜 못 받는가?” 한국 건축계를 비판하는 논조의 기사가 자주 나왔다. 정부가 수상자 제로인 현실을 타파하고자 나서기도 했다. 2019년 프리츠커 수상 프로젝트를 구상, 해외연수까지…

그러나 전통을 재해석해야 할 건축가들이 상을 받는 시대다. 한국식 건축을 연구하지 않고 해외연수를 갔다 오면, 상을 받는 데 도움이 되겠나? ‘가장 전통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다.’ 그런 논리 때문에 무산되기도 했다.

올해 ‘프리츠커 프로젝트’를 재추진한다지만 인큐베이팅이 가능할까? 가장 한국적인 건축가 류춘수에게 눈길이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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