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천판묘련, 함안 연꽃테마파크의 황홀경

함안 연꽃테마파크

연꽃은 핀다. 피우는 걸 봤다. 꽃잎을 오므린 천판묘련(千板妙蓮) 일천, 꽃이파리 판, 묘할 묘를 쓰는 연꽃이다. 절로 피어난 건 아니로되, 그 자태는 황홀하다. 신비롭고 단아한 형상 자체가 눈을 붙든다.

아라홍련, 가람백련, 가시연, 수련들을 무수하게 보았건만···. 함안의 연꽃테마파크, 연지에서다. 천판묘련의 색채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겉잎으로 갈수록 진한 분홍빛이다. 선홍빛의 맑은 피가 뚝뚝 흐르는 듯하다. 안쪽 부드러운 속잎은 하얀 빛이 감돈다. 마치 속살을 보는 듯 부드럽게 보인다.

아라홍련이나 그 어떤 잡종 강세의 연꽃들보다 그렇다. 가히 비할 바 없는, 연꽃 중의 연꽃이다. 여류 이병철 시인의 말이다. “천판묘련이 피는 걸, 피우는 걸 본 사람과 못 본 사람으로 세상은 둘로 나뉜다.”

‘천상운집’. 밥집에 가면 많이 걸려있는 글귀다. ‘천 가지 상서로운 기운이 구름처럼 몰려온다’는 뜻이다. 자주 찾던 단골식당 물자리에도 걸려있다. 예약을 하면 이 글귀가 걸린 방을 준다. 일천 ‘千’을 썼지만, 이때는 무수함(Countless)을 뜻한다. 천파묘련의 ‘千’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겠지…

코를 대고, 연향을 맡는다. 은은한 미향이 코끝을 스친다. 강하진 않지만 귀품이 서려있다. 천판묘련 꽃잎으로 차를 우리면 향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단다. 꽃잎 하나로 10여명이 입안에 감도는 은은한 향을 느낀다니…그 묘미를 나도 언젠가 맛보고 싶다.

이상기후, 아니 기후위기가 촉발한 기습폭우와 긴 장마 탓인지 한촉의 꽃만 피워냈다. 수의사를 오래한 김을규 선생이 천판묘련을 복원해냈다. 그의 연꽃 사랑은 지극하다. 14년 전 세워진 함안의 연꽃테마파크에도 그의 공력이 오롯이 담겼다.

7순의 노익장으로 구리빛 얼굴, 한가지에 매진한 사람 특유의 천진함이 슬쩍 보인다. 아라홍련은 탄소연대기 측정 결과 700년 전으로 나왔다. 함안의 연꽃테마파크 푯말들에도 다 그렇게 기재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김을규 선생은 말을 아꼈다. 하지만 털어놓은 말에 비사가 있으니 말이다. 혹시 담당 연구직에 불이익이라도 갈까봐서 그렇다.

연대측정 당시 장갑을 끼지 않고 씨앗을 만졌다. 그렇게 손을 타면 몇 백년 훌쩍 내려가 버린단다. 고려시대 때 탱화에 아라홍련의 자태가 그려져 있다. 아라홍련을 복원한 오리지날 씨앗의 생몰연대는 신라말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씨앗이 있다면 다시 측정해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

천판묘련을 본 감회가 여지껏 심금을 울린다. 불교 경전 중 경전인 반야심경. 색성향미촉법은 부질없는 것인데, 인간의 굴레다. 천판묘련 보고난 뒤, 맨발로 연지를 다시 걸었다. 수천 수만의 연꽃들을 다시 봤다. 엊그제 눈을 사로잡고 가슴을 뭉클 하게 하던 연꽃. 그 아라홍련이 그만 빛을 잃었다.

꽃은 그대로이건만, 더 눈부신 걸 본 인간 마음이! 이다지 간사하게도 변해버린 거다. 천판묘련을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연꽃 지킴이 김을규 선생과 천판묘련 피우는 날, 재회를 고대한다. 그에게 들어본 연꽃 세계는 대자연의 신비에 다름 아니다.

흔히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핀다고 한다. ‘이제염오(離諸染?)’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지만 꽃과 잎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로 새긴다. 시인묵객들은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 피고, 한 방울의 비조차 머금지 않는다고 노래했다. 그 이유는 연꽃 스스로가 청정하기 때문이란다.

연꽃은 특이하게 한여름에 꽃을 피운다. 해님 달님 별님 비님 바람님 진흙님의 도움으로 ‘유연불삽(柔軟不?)’. “연잎은 부드러워 강한 것에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불여악구(不與惡口)’. “연잎에 물 닿아도 한 방울도 머금지 않듯, 악에 물들지 않는다”는 거다. ‘개부구족(開敷具足)’도 있다. “연꽃은 피고 나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선비들은 연꽃이 봉오리 맺고 피어남을 군자의 도에 비유했다. 불교는 그보다 더욱 연꽃을 높인다. 불교의 상징인 이유는 고사(故事)들 ‘不與惡口’ ‘開敷具足’ ‘離諸染?’가 불교와 통해서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는 연기법이다. 연분홍빛 천판묘련 꽃이파리들에 새겨진 가느다란 선홍 핏줄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천판묘련을 피운 김을규 선생 마음이 느껴진다. 그는 말한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 살지 못합니다. 제초제가 조금만 있어도 죽습니다. 햇볕이 잘 들고, 깨끗한 곳에서만…”

연꽃 자체가 환경보전의 바로미터라고 한다. 통념은 자주 깨어진다. 연꽃 중의 연꽃을 본 감회가 코끝을 스친다. 그 신비로운 은은한 묘향으로 남았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 오면 오는 대로 고요히 선 연꽃처럼 마음을 비우고 살련다.

매미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누군가 쓴 글의 ‘금선탈각(金蟬脫殼)’을 본다.탈각 혹은 탈피, 목숨을 거는 위태로움이다. 매미에게 허물을 벗는 작업은 고통과 인내다. 그런 후에야 단 일주일 울음을 터뜨릴 수 있다. 허물을 벗는 우화등선은 혁명보다 힘든 일이다. 언젠가 허물 벗고, 신선처럼 살기 바란다마는 그 또한 부질없는 일…”아름다움을 탐하나, 거기에 어두운 매미(昧美)”(이창훈)라고 언어의 유희를 멋지게 한다. 천판묘련의 자태가 눈에 어른거린다. 지극한 아름다움과 은은한 향을 제대로 느꼈을까?

함안 연꽃테마파크 옛 가야 지구의 천연 늪지를 활용해 만든 자연 친화적인 테마공원이다. 공원의 탄생 배경에는 70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스토리가 있다. 2009년 5월 함안 성산산성에서 연꽃 씨앗이 출토되었다. 씨앗은 탄소연대측정 결과, 700년 전 고려 때로 밝혀졌다. 이듬해 파종한 씨앗이 꽃을 피워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함안군은 연꽃의 이름을 아라가야라는 함안 향토사에서 따와 ‘아라홍련’으로 짓는다. 아라홍련의 부활을 기념, 연꽃테마파크를 조성했다. 아라홍련, 가람백련, 수련, 가시 연까지 다양한 연꽃이 있다. 연꽃은 7월부터 피기 시작해 8월말이면 자취를 감춰버린다.

수만 송이 연꽃 사이로 마사토를 깐 흙길과 징검다리가 있어 꽃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맨발로 흙길을 걷는 게 대세다. 데크를 깔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한 사람도 바로 김을규 선생이다. 그의 공이 크다. 그는 경회루에 활짝 피어난 연꽃들도 복원해낸 바 있다. 핏줄처럼 겉에 실금이 간 아리따운 법수련들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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