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사선문화제’ 35년간 이끄는 양영두 “참으로 징하다”
유서깊은 ‘사선문화제 35년사’ 발간 경하…문화국가 문화전북 문화임실에 큰 공헌
양영두 형은 참으로 징헌 사람이다. 솔찬허니 질기고 오지고 그래서 징허다… 때로는 너무 질겨, 멀리 하고 싶어도 하는 일이 오져서 내칠 수도 없으니 우예 하리오.
동교동에 투신해 김대중(DJ) 대통령 만들기에 반세기 헌신했다. 그는 이른바 ‘민주의 제단’에 한쪽 눈까지 바쳤다.
그렇게 헌신했음에도 망(望) 80인 그에게 정치운은 따르지 않았다. 헌신적으로 임실을 사랑하고, 사선문화제에 몸을 바쳤음에도 얄팍한 정치 바닥에선 그를 챙기지 않았다.
동교동이 DJ 대통령을 만들고도, 눈까지 바친 우직한 그에게 배지 하나 안 준 건 잘못한 일이다. DJ야 대권을 쥐기 위해 젊고 참신한 피의 수혈에만 관심을 쏟았다 치더라도 영원한 동교동 2인자 권노갑은 양영두를 챙겼어야 한다.
물론, 권노갑도 힘 좀 쓰려고 하는 순간 등 뒤에 누군가가 비수를 꼽아 힘이 빠져 미처 챙길 여력이 없었겠지만…
과거야 흘러간 거지만, 양영두는 1년여 전에도 이낙연을 위해 그리도 헌신적으로 도왔건만, 이재명한테 졌다. 정치운이 없는 사람이다.
90년대말 민선 자치시대가 열리자 양영두는 ‘소충제’와 ‘임실군민의 날’을 통합해 ‘소충·사선문화제’를 출범시켰다.
양영두는 우직하고 징허지만 오져서 그런지, 감각과 촉은 살아있다. 소충(昭忠)의 나라사랑을 기리고 사선(四仙)의 고향사랑을 이어가자고 하는 게 문화제와 시상의 목적이다.
양영두에게 “사선문화제가 당시 주민들에 큰 관심을 끈 이유는?” 묻자 답한 것이다.
출발 당시 100명의 제전위원들이 모여 시작하면서 참여와 관심도를 높였다. 정치 바닥에서 조직도 홍보도 해본 게 바탕의 저력으로 작용했으리라…
당시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시와 군민의 날 행사 외에 민간 차원에서 향토 문화적 지역축제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양영두의 촉과 정성으로 사선문화제는 갈수록 인기를 끌었다. 몇년 안 가 2000여 제전위원이 모여 거군擧郡적으로 힘모아 준비했다.
양영두는 보기에는 둔직하다. 그러나 조직관리에도 능하다. 배려와 솔선으로 나·남 모두 움직인다. 제전위원과 이사, 부위원장 등으로 자발적 조직체계도 꾸렸다. 그들이 중심을 잡고 주축이 돼 자원봉사를 하는 게 원동력이다. 자생적 조직의 성공사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일 게다.
양영두는 매년 문화제를 앞두고 거의 ‘거지’처럼 읍소하고 손을 벌린다. 그런데 제 배를 채우려 하지 않으니, 거지라기보다는 구도의 탁발승이다. 말이 그렇지 한 개인이 해마다 막대한 돈을 마련하기가 결코 쉽지 않으니… 창립 후 10여년은 지자체의 보조 한푼 없이 맨땅에 헤딩했다. 광고협찬이나 향토문화를 지원하는 기업 후원으로 충당했다. 당시 중앙 방송사를 설득해 축하 프로그램을 유치했다. 그리고, 도내는 물론 인근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누비고 다녔다. 전북의 외진 곳 임실 행사에 경상도 사람들도 왔다. 충청도 양반들도 느릿느릿 다녀갔을 정도다.
내가 다니던 동아일보 친정에도 양영두 형은 매년 빠지지 않고 왔다. 나도 색동 한복 차림을 한 미모의 4선녀와 여러 번 찰칵 찍혔다. 4선녀를 대동하고 신문·방송 등 언론사를 순방하곤 했다.
재경 전북 및 임실향우회 인사들도 문화제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징허게 질긴 양영두의 각고의 노력으로 중앙 언론 등에 사천문화제와 소충사선문화상 관련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면서 일반기업의 광고 협찬도 몰리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작고한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쾌척했다. 향토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선뜻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삼성 등 대기업에서도 사선문화제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방송 앵커 출신의 이인용 사장도 힘을 보탠 사선제의 은인이다. 사선문화제위원회는 위원장을 정점으로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한다. 부위원장과 상근직 이사를 상임 제전위원 중심으로 회의를 통해 코로나19 이전부터 협의제로 사안을 처리한다.
오래 전부터 임실읍과 관촌면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제전위 운영에 관여하고 공의적 운영체제를 유지했다. 합리적 민주적 리더십을 가진 인물을 내정해 향토문화제를 전승할 인물을 지속적으로 양성한다니 다행이다.
전국을 무대로 사선문화상 수상자를 꼼꼼하고 치밀하게 선정한다. 소충사선문화상으로 폭을 넓힌 이후 전국을 대상으로 인물을 선발했다. 그래서 권위를 인정받는다. 문화계 대통령인 김종규 문화재국민신탁 위원장에게 올해의 소충·사선제 대상을 주기 위해 나까지 동원했다.
김종규는 그러나 끝내 고사했다. 고사의 변이 삽상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의 오늘을 열어준) 장형 김봉규와 함께 維二로 존경하는 고 이어령 선생이 불과 2년 전에 이 상을 받았으니 조금 더 세월이 흐른 뒤에 주시면 받겠다” 했다.
국가와 사회를 비롯한 경제 농업 등 각 분야의 헌신 봉사하는 인물을 선정해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제 소충·사선상은 나라사랑과 고향사랑의 정신으로 우뚝하게 전국적 권위의 향토문화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시상의 품격이 높아지면서 전북과 임실의 위상도 높였다고 양영두는 자랑한다.
사선녀 선발 전국대회는 사선대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 여인상을 세웠다. 한해도 쉬지 않고 35회를 진행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양영두의 우직함과 뚝심 덕분이다. 사선녀는 이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특화된 브랜드로 국민적 관심과 성원도 받고 있다.
사선대라는 명승의 역사성을 지키고 향토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전위는 여전히 목마르다. 그래서 축전의 계승·발전·진화를 깊이 고민한다.
코로나19 등 각종 재난을 이겨내고 재정 문제를 극복하는 거야말로 참으로 두고두고 지난한 과제다. 35년 세월과 양영두는 지치거나 굴하지 않고 거의 싸우면서 이겨왔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뜻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길이 났다.
그리고 공든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도 실천해냈다. 양영두의 절절한 회고 한토막.
“강산이 세번 반 바뀌는 가운데 제전위에 참여한 많은 위원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처음부터 함께 한 그들이 지금도 무보수로 봉사하고 계신다. 이분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먼저 가신 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지역의 관심과 성원이 없었다면 존속하지 못했을 35년째 올해 행사는 두번 미루다 입동 지난 후에야 진행했다. 서울과 전주에 거주하는 출향 인사와 많은 사람들이 양영두 형께, 35년 각고의 노력에 격려와 수고를 전한다.
“더욱 열정적으로 고향사랑과 나라사랑에 앞장서 달라고 하시며 시간을 내달라는 정감어린 말이 큰 위로가 됐다.”
양영두와 함께 한 35년 세월의 사천문화제, “쉼 없이 달려온 세월에 감격의 눈물이 절로 나왔다”고 형은 토로한다.
양영두는 “지역의 주민과 언론 및 지자체 정치권 관계자들에게 2023년에도 사선대 행사장에서 뵙기를 희망하며 감사의 뜻으로 큰 절 드린다”고 했다.
그와 나는 황해도 연백 사나이 고 송해 선생과 인연으로 더욱 두텁게 연분을 쌓아왔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인간 송해의 체취가 더욱 기리워져 울컥해진다.
우직하게 도산 선생의 희생·봉사·솔선수범 정신을 실천궁행하는 영두 형의 노고에 거듭 경의를 표한다.
지루하고 평범할 수 있는 고단한 일을 쉼없이 35년간 지속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비범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