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소리꾼 장사익②]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앉은 자리가 꽃자리'”
[아시아엔=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장사익은 40~50년 전부터 부르던 ‘님은 먼곳에’, ‘봄비’, ‘대전 블루스’ 같은 옛날 노래도 자주 부른다. 역시 자기의 숨 길이에 사익 표 운율에 맞춰 부른다. 리바이벌도 똑같으면 모양이 빠진다.
“그러면 이미테이션(Imitation) 가수가 된단 말이죠. 카피(Copy)해봐야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오리지널(Original-원곡)이 있지만 새로움을 부여해야 새롭게 태어나는 거라고 사익은 말한다.
우리 악기와 서양 악기를 함께 사용하는데 동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한다. “해금과 바이올린이, 아쟁과 색스폰이 함께 무대에 등장해도 잘 어우러집니다. ”
사익은 “그것도 배려예요. 노래하는 사람의 음악적인 배려”라고 해석했다. 보통 가수들 보면 사운드가 똑같은데, 사익의 음악에는 주인공이 계속 달라진다. 트럼펫이 주인이고 기타가 주인이고 해금이 주인이고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면서 노래를 엮어나간다. 토속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때로는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모여 음악으로 재구성된다.
그래도 잘 익어서 어울리게 만들면 새로운 생명력으로 외국 사람에게도 다가갈 수 있다는 거다.
“악기 하는 친구들이 뒤에서 두두둑 소리북을 치든지 추임새를 넣어요. 같이 만들어 가는 음악인 거예요. 그리고 나는 공연할 적에 스모그(Smog-드라이 아이스가 내는 연기)같은 거 일절 안 피워요. 연기 피우면 멋있죠. 하지만 맑고 깨끗한 그대로, 그대로가 좋아요.”
사익 형은 몇년 전 성대 결절로 8개월 간 노래를 쉬었던 적이 있다. 상한 건강을 되찾고 내공을 키우려고 태극권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사익 형은 쉬는 동안 ‘소름 끼치는 노래’를 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멕시코 여가수가 90살 넘어 부른 노래였는데, 아 그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예요. 노래를 압축해 불렀어요. 힘이 남아 있으니까 테크닉으로, 파워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 힘이 달릴 거란 말이죠. 자연 그대로 늙은이면 늙은이답게 해야 해요. 호흡이 짧으면 짧은 대로 음이 안 올라가면 안 올라가는 대로. 여든 살, 아흔 살 완전히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 지팡이 짚고 읊조리면서 노래한다고 쳐봐요. 얼마나 멋있어요. 그게 진짜 노래고 진짜 소리란 말이죠. 바로 그런 노래를 계속 할 거예요. 그러려면 빠지는 힘과 반비례해서 내공을 더 길러야 해요. 우리나라 최고 무용가 조갑녀 선생님이 인생 춤을 나에게 선물했어요. 휠체어 타고 와 딱 서서 손 하나 탁 올리고 발 한 번 움직이고 앉은 거예요. 기가 막혔어요. 딱 1분으로 ‘지구가 무너지는 춤’을 추신 거죠. 나도 그런 노래를 하려고 해요. 그러니 나이 먹는 게 얼마나 재미나는 일인지 몰라요(웃음)”
사익 형이 20년 가깝게 살고 있는 세검정 집, 봄이면 건너 석파정 위 벼랑에 진달래가 만발한다. 눈이 내릴 때, 비가 올 때 그 집의 큰 통 유리창으로 보이는 경치는 참 절경이다. 사익형이 숨겨 둔 독주(51도 금강주?)를 꺼내와 한 잔 따라주는 걸 마시면서 봄 꽃구경을 한 일이 생각난다.
“자연과 가깝게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시내는 다 회색이잖아유. 밖을 보면 하늘이 파랗고 때로 회색빛, 희노랄 때도 있고, 꽃 필 때도 있고 단풍 질 때도 있고 사시사철이 다 있으니. 사람 만나는 것도 인연이지만 집 또한 인연인 거지유. 마음이 편안하고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수 있는 집이 스위트 홈이어유.”
사익 형은 가수 데뷰 전에 꼽아보면 15~16개의 직업을 전전하다 마흔여섯에 가수가 됐다. 반올림해 30년, 노래하는 이의 가슴도, 듣는 이의 마음까지 덥혀주고 어루만져주는 소리를 했다. 성대 결절로 목에 혹이 생겨 노래를 못하던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노래를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경비를 하려도, 운전을 하려도 허리가 아파 못 하겠고 막막했지유.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노래인 거라.”
수술 후 증세가 나아진 뒤 그가 공연을 재개했다. 그때 제목이 ‘꽃인 듯 눈물인 듯’이었다. ‘노래를 부를 때가 꽃이라면, 노래를 못 할 때는 눈물’이라는 뜻이라고 그는 말한다. “노래도 못 하면 세상에 없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했다”며 죽는 시늉까지 하면서도 만면에 미소다.
수술 결과가 좋아 ‘눈물의 8개월’ 후 다시 세종문화회관에 올라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그 후 연말까지 대전, 부산, 대구, 하남, 김해, 광주를 돌며 전국투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성대에도 근육이 있어요. 60년, 70년 굳어져 온 근육을 도려낸 자리는 몰랑몰랑하단 말이죠. 바람을 내도 약간 흔들릴 거고, 동그란 소리를 내려고 해도 약간 굴곡이 지고, 높은 소리에서 자신이 좀 덜 가고…”
사익은 그때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추억했다. “미국 가서 한국말로 하는데 슬프게 부르면 그들도 뭔가 슬프게 느끼고, 내가 빨갛게 부르면 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사람들 느낌은 다 똑같은 거예요. 인생은 꽃일 때도, 눈물일 때도 있어요. 요즘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울지도 않잖아요. 옛날에는 막 곡을 하고 울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 하찮은 대중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니 이게 얼마나 멋있는 일이에요? 한번 신나게 울어젖히면 개운해요. 노래, 예술의 힘이죠.”
7학년을 넘은 그는 인생이 ‘언제 가장 힘들더냐?’고 물으면 “맨날 힘들었다”고 답하곤 한다. 시원하고 편안할 때가 아니라 힘들고 더운 계절에 성장한다는 사익의 말. “어느 분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당신의 계절은 가을일 것’이라고. ‘아니어유. 한여름이어유’. 여름에 모든 식물들이 성장을 해요. 봄에 싹이 나와 꽃을 피우면 그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혀서 여름에 크는 거죠. 우리는 하루하루 여름처럼 힘들게 살아요. 그렇지만 그 여름은 진행형이란 말이에요. 가을에 진행을 멈추고 겨울엔 죽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사익 형이 앞으로 100살 넘게 노래를, 시대의 소리꾼으로서 계속하기를 바란다. 그가 맞는 익은 7학년 인생을 넘어 8, 9학년까지 계속, 아니 백수를 넘어서도 그렇게 하길 빈다.
10학년 몇 반(100살 넘어)에도 한국춤 원로가 인생 춤을 그에게 보여줬듯이 팬들에게 그런 인생 노래를 부르길…조갑녀 선생이 탁 손 한번 올리고, 쓱 다리 한번 내리듯 그렇게 인생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태양빛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들판에 곡식 익는 향기같은 소리를 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것도 그의 지론이다. “힘든 시기야 무수히 많지만 그건 다 핑계예요. 그 자리가 고되고 힘들어도 각자한테는 꽃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맨날 잘려서 20곳은 모자라고 10여 군데에서 직장생활 했어요. 그때 술, 담배 했으면 서울역 ‘숙자 형들'(노숙자)하고 같이 있어야 돼요. 그때 나는 ‘내가 부족해서 그래’, ‘내가 못나서 그래’ 하고 오뚝이처럼 일어났어요.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어. 나는 행복한 거여. 실패한다 해도 경험으로 여기면 공부가 돼요. ‘좋아, 내가 10년 안에 이 회사 접수하겠어.’ 이런 마음으로 해봐요. 그러면 이 세상이 내 것이 되는 거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