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1위, ‘지금 우리학교는’ 관람기 

지금 우리학교는

대한민국 대중문화 컨텐츠제작 역량에 가슴 벌렁!

오징어게임처럼 ‘소파귀신’ 돼 관람 뒤 뭔가 ‘찝찝’

[아시아엔=최영훈 동아일보 전 편집국장] 넷플릭스 1위를 꿰찬 <지금 우리학교는>(이하 ‘학교는’)이 지구촌 시청자들을 흔들고 붙들었다. 대한민국을 일약 대중문화 컨텐츠 강국으로 등극시킨 <오징어게임>의 인기를 넘어설지 관심이 크다.

2일 글로벌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은 <학교는>이 넷플릭스 TV쇼 부문 전세계 1위(54개국) 자리를 지켰다 했다.

‘학교는’은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한 고교에 고립된 군상과 구조하려는 이들이 겪는 극한 상황을 그렸다. 주동근의 네이버 웹툰이 원작으로 박지후, 윤찬영, 조이현, 로몬 등 슈퍼 루키들이 대거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의 좀비쇼가 당신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 것”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오징어게임 포스터

‘학교는’은 지구촌에 드리운 암울한 좀비 그림자를 보여주는 ‘실존주의 작품’이라는 전문가 평이다. <오징어 게임>을 뛰어넘는 ‘글로벌 대박’을 칠 것이라고 예상하긴 이르지만 시즌2 계획까지 잡혔다.

한국이 좀비영화에 필수인 특수촬영 및 분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임을 만천하에 과시한 효과도 거뒀다. 미국 버라이어티는 “오징어 게임처럼 악몽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며 “현기증이 났다”고까지 했다.

앞서 <오징어 게임>은 지구촌 1억1100만 넷플릭스 구독 가구(90여개국 중 66개국 1위)가 시청한 바 있다. 가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돌풍은 한국 드라마가 오랜 기간 발전해 온 축적의 결과”라고 극찬했다.

국내에도 K드라마의 세계적 진출이라며 축하와 환영 일변도의 반응이 나왔다.

필자 기억으로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만 뜬금없이 첫 비판 목소리를 냈다. “오징어 게임이 세계 1등 했다고, ‘K-드라마 도약’에만 들떠 칭찬이나 할 일인가?”

456명의 ‘밑바닥 인생’이 게임에 참가해 최종 우승자에게 456억원을 준다는 설정은 분명 의외성이 있다. 그러나 게임 때마다 수십명이 떼죽음 당하는 그 처참함과 잔인함은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참가자 투표로 게임을 중단시킨 후 간신히 빠져나온 세상 또한 생지옥이라는 스토리텔링은 그럴 듯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살인 게임’에 돌아간 루저(Loser)들의 헛헛한 표정 등 출연진의 연기도 압권이었다.

‘공정한 게임’ 같지만, 결국 모두가 죽는 운명을 그린 니힐(Nihil, 허무)의 서사도 수준급일 지 모른다.

<오징어게임> 제작진도 현실에 빗대 드라마를 만들어 “세계가 극찬했으면 됐지 왠 시비?”라며 코웃음 칠 지도 모른다.

사실 주식과 코인의 이상 열기로 영끌하듯 도박에 나섰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아주 많다.

<오징어게임>의 예에서 잔인하고 지나치게 폭력적인 영상과 스토리텔링뿐만 문제인 것은 분명히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인명경시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드라마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다.

도덕군자처럼, 꼰대처럼 세계 1위를 두번째 달성한 드라마에 대해 장기표 원장처럼 짓궂게 한번 말해 보련다.

성장과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 문명이 한계에 도달한 징표는 곳곳에서 목격된다. 지구촌을 휩쓴 팬데믹 또한 지구가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로 새겨야 한다는 선각의 목소리도 커진다.  

흥행이 목표인 드라마 제작진은 그렇다 치고 칭찬 일변도인 평자들 수준은 최소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장기표는 “넷플릭스 1위라고 모두들 칭찬만 하니, 우리 사회는 망하는 길로 치달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지금 우리학교는 

두번째 1위 ‘학교는’은 어떤가?

사람이 아닌 좀비들이 아니다. 방금까지 살아서 같이 있던 부모나 친구들도 물리면 바로 좀비가 된다. 부모 중 한명이 물려 좀비로 변한 한 출연자가 독백처럼 한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죽은 사람은 언젠가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좀비로) 변한 사람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좀비이기 때문에 삽으로 쳐죽이는 모습에서, 살기 위한 ‘방어적 폭력’이긴 하지만 끔찍함이 느껴진다. 좀비가 달려들어 사람을 물어뜯고 피를 흘리는 화면에서 피 비린내가 확 풍길 듯한 불편함도 엄습한다. 

일본 작가 후지타 나오야가 좀비를 매개로 획득한 통찰은 신자유주의를 직격한다. ‘학교는’ 같은 좀비물을 볼 때의 불편함 저편에 그런 수준 높은 메지시를 어떤 사람들은 포착할 수 있다.

작가의 그런 해석이 다소 억지같고 비약이라는 느낌이 내겐 없진 않다.

“21세기의 좀비 스토리텔링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통치하기 위한 장치…”(좀비 사회학)

그의 촌철은 “살아남기 위해선 뭘 해도 상관없다”는 극단의 에고이즘(자기중심주의)을 질타하려는 건가?

“신자유주의를 자기도 모르게 정당하다고 느끼게 하는 효과를 경계하자!”는 제언까지 참으로 놀랍다. 아무튼 무수하게 많은 좀비 영화들이 각양각색의 좀비들을 만들어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좀비의 원형은 조지 로메로 감독이 만들었다. 그의 데뷰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서다.

물론 이 영화 전에도 좀비는 있었다. 그때의 좀비는 아이티의 부두교에서 유래했다. 주술사들이 특수한 약물로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 농장주에게 넘기고, 좀비는 기계처럼 일만 한다.

“좀비는 느리고, 굼뜨고, 식욕이란 본능만 남아 살아있는 사람을 먹는다. 좀비에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조지 로메로의 영화가 레거시(Legacy-전설)인 건 이런 좀비 이미지를 창시한 때문에서만은 아니다.

이 영화가 던진 좀비 메타포는 관객들이 인종 갈등, 냉전, 베트남전쟁에 대한 ‘분노의 냄새’를 맡게 만들었다.

호러(Horror-공포) 영화가 정치적 화두를 던지는 메신저로서 탁월한 장르임을 증명한 거다. 살아있는 인간인 줄 뻔히 알면서, 흑인이기에 사냥하듯 그냥 방아쇠를 당긴 비인간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당시 흑백 인종갈등이 최고조였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된 바로 그해였다. 영화는 그때 세상에 나왔다. 로메로는 모두 3편의 좀비 영화를 만들었다.

두번째 영화는 나도 본 기억이 난다. 대형 쇼핑몰을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다. 대형 쇼핑몰로 피신한 사람들이 탈출이고 뭐고 잊고서 거기 눌러 앉아 흥청망청 안온함에 젖기 시작했다.

그러다 상품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빈틈을 보여 몰려온 좀비들에게 떼죽음 당한다. 끝부분에 쇼핑몰 매대 주변을 좀비들만 어슬렁거리는 장면은 소비문명에 대한 통렬한 ‘고발 메타포’였다.

물론 그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고 그런 대로 잘 만든 좀비물 하나를 봤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평자들은 “노도와 같은 물신화와 소비지상주의를 제대로 풍자했다”고 갈채를 보냈다. 

로메로 감독이 데뷰작에서 좀비의 원형을 창조한 데다 뚜렷한 메시지까지 담아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학교는> 한 장면

<학교는> 역시 잘 만든 좀비물이다. 40분 남짓의 12편으로 이뤄진 오리지널 드라마 매편이 각기 손에 땀을 쥐게 할만큼 흥미롭다.

한번 보면 꼬리를 문 “아, 주인공이 살아남을까?” 호기심 자극으로 후속 서너 편은 그냥 계속 보게 한다. 그만큼 중독성과 흡인력이 강한 구성과 스토리텔링에, 실감나는 영상까지. 좀비물치고는 넥플릭스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부었다.

이전 좀비물에서 못 본 학교라는 공간의 폐쇄적 특수성도 전 세계 넷플릭스 가입자의 눈귀를 붙든 요인이었다. 학교 사회의 모순된 권력관계나 학생간 일진-왕따 관계, 풋풋한 3각관계 등등···. 극한 상황에서 난무한 잔인한 폭력 장면들에 눌려 지친 마음을 다소 누그러뜨리려 넣은 장치들이다.

그러나 로메로 감독처럼 사회에 발하는 정치 메타포나 대중에게 환기시키려는 게 뭔지는 영 아리송하다. 자식을, 또는 친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달려가고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휴머니즘인가?

잔혹한 장면이 가득한 좀비 영화치고는 때로 누선을 자극하는 게 오히려 겉도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그런 희생이 “더는 죽지 말자”는 공감으로 이어져 여학생들까지 모두 좀비들과 맞서려 분투하는 감동도 물론 있다. 폭력성이 짙은 좀비물, 거기에 잔잔한 감동의 장면들이 없는 건 아닌데···. 딱 그 정도에 그치는 것 같다.

드라마의 전체성을 재미와 의미라는 양대 축으로 보자면 뭔가 2%가 부족하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오징어게임> 때도 <학교는>을 보고났을 때처럼 “뭐라 콕 집긴 힘들지만 헛헛함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 눈 아프게 왜 봤지?” 후회랄 것까진 없고 불편함도 아닌 데 뭔가, 그 찝찝함 말이다.

장기표는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오징어게임에 박수를 보내는 전 세계가 미쳐서 망조가 들었다”고 했다.

그 말에 해답이 있을까? 정말 대중문화의 천박함, 선정성이 하늘을 찌른다. 첨단영상 기기의 발달로 눈귀를 붙드는 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자극적인 스토리텔링까지 압도적이다.

세기말의 음습하고 기괴한 소재의 드라마가 ‘넷플릭스 괴물’을 통해 실시간 지구촌을 엮어 열광하게 만든다. 보는 순간 짜릿하고, 손에 땀을 쥐었으면 됐지, 고급문화도 아닌 대중문화에 뭘 더 기대하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요즘 세대들이 나에게 퉁박을 주면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메타버스 시대가 본격 도래했다. 걱정이다. 이런 가상이 리얼보다 더 리얼한 세상이 전개되니 말이다. 거기에 폭력성과 선정성이 탑재되면 인간성의 황폐화와 극단성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치닫지 않을까?

아! 맞다. 나도 드디어 장기표 원장과 같은 ‘꼰대 반열’에 올랐나 보다. <학교는>을 본 뒤 이런 절절한 통찰과 깨우침이라도 얻었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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