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소리꾼 장사익①] “박자 말고 그냥 호흡대로 가는 거예요”

소리꾼 장사익

[아시아엔=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그는 가수다. 가수는 가순데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소리꾼이라 한다. 그래서 그의 공연은 콘서트가 아니다. 팬과 함께 하는 큰 소리판이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 시대의 소리꾼, 바로 장사익이다. 내가 형으로 모신다. 가수 중 유일하다. 그 사익 형이 오랜만에 방송을 탄다. 그것도 한두 곡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26일 오후 6시 KBS2의 불후의 명곡에 나와 1시간30분 동안 자그마치 10곡 부른다고 한다. 녹화방송은 했다. 첫 곡은 자작곡인 찔레꽃이란다. 그가 직접 노랫말을 쓰고 작곡한 몇 곡 중 하나다.

가사도 절절하다. ‘슬픈 찔레꽃…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그는 전생에 음유시인이었을 거다. 노래를 하면서 밥을 얻어 먹고 천하를 주유했으리라. 그가 즐겨 부르는 ‘봄날은 간다’는 최백호와 듀엣으로 열창했다.

객석은 같은 듯 다른 두 음색의 울림에 감동의 도가니였다 한다. “페친 여러분, 꼭 본방사수해 민족의 소리꾼에게 박수를 보내시라. 나는 장사익을 좋아하는 만큼 이어령 선생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두 사람은 연배는 10살 가찹게 차이지만 충청도란 공통점이 있다. 이어령이 내륙 강가 공주 태생인 반면, 사익은 갯가 광천 태생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꽤 오래 질기게 이어져 왔다.

사익이 스타가 되기 전 이어령의 크고 작은 강연이나 행사에 자주 동행했다. “노래 좀 허는(하는)” 사익 형의 재능을 천재 이어령이 일찌감치 간파한 거다.

2년 전, 문화·예술계 모임인 ‘광화문 문화포럼’이 이어령에 제1회 광화문문화예술상을 수여했다. 그때도 사익 형이 행사장을 찾아와 축가를 불렀다. 두 사람은 집도 세검정 평창동으로 10분 거리다.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이 얼마 전 이어령을 찾아 액자를 건넸다. 가로 세로 1m가 넘는 큰 액자였다. 이어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쓴 헌시를 담았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를 사익 형이 유려한 붓글씨로 쓴 것이다. 소리꾼, 사익 형의 치솟아 공중을 떠돌다 폭포처럼 내리꽂히는 그 소리가 글씨에도 묻어났다.

사익 형은 이 글을 산문시처럼 붙여썼다. 이어령은 액자를 거실의 눈에 띄는 자리에 세워뒀다. 사익 형은 노태우 전 대통령 유족에게도 붓글씨로 쓴 ‘질경이 꽃’ 액자를 전달했다. 

사익 형과 나의 인연은 한 20년쯤 됐다. 권혜진이라는 후배가 그와의 인연을 이어줬다. 세검정 사익 형의 집에 나는 권혜진과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갔다. 살갑게 맞아 준 사익 형에 사람 욕심이 강한 나는 금방 매료됐다. 그때 사익 형 형수가 고추장 돼지불고기를 저녁상에 내와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01년 뉴욕 한인 레코드점에서 사익 형의 노래를 담은 CD를 발견하고 20달러인가를 내고 바로 샀다. 미국 중부 일리노이를 지날 때 그 CD를 틀었다. 첫 곡이 동백아가씨였다. 이미자의 그것과는 또다른 사내의 발성, 치솟았다 내리꽂히기를 몇번 반복했다. 눈을 감고 감상하던 내 눈에 노스탤지어(향수)의 이슬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60년대 말 유행가를 한 3년 배우고 나이 들어선 국악도 배우고 클래식도 듣고 했다. “그 모든 게 다 쌓인 것이겠죠. 프리 재즈 중 타악기 1인자 김대환 선생님께 들은 한 마디가 내 노래를 변화시켰어. 날 보고 노래 해보래서 했는데 ‘너 박자 맞추지 말고 해봐’ 그러시더라고. 다시 산토끼를 불러보라고 시켰는데 또 그래요. ‘너 속으로 박자 세고 있잖아.’ 그때부터 박자를 무시하고 노래를 했죠. ‘찔레꽃’도 박자가 없잖아요. 그냥 호흡대로 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노래를 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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