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이 저물던 어느 날 구달 선생님이 내게 이메일 연하장을 보내주셨다. 거기에는 ‘네개의 촛불’이라는 파워포인트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평화(peace)의 촛불이 이제 아무도 자기를 지켜주지 않는다며 힘없이 스러지고, 믿음(faith)의 촛불도 더 이상 사람들이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며 쓸쓸히 사라지더니, 드디어 사랑(love)의 촛불마저 꺼져버린 방에 어린 아이가 들어온다. 언제까지나 함께 타기로 했던 네개의 촛불 중 이미 세개가 꺼져버린 걸 보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에게 마지막 촛불이 이렇게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타고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다른 촛불에 새롭게 붉을 밝힐 수 있단다. 나는 희망(hope)의 촛불이니까.”
2014년은 우리를 여러 차례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는 나름 퍽 진지한 꿈이 있다. 나는 언젠가 동물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리라 꿈꾸며 산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도 분명 평화와 사랑이 존재한다. 때론 믿음에 기반을 두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듯한 행동도 관찰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처럼 희망을 말하지 못한다. 2009년 여름 지하 600여m 갱도에 매몰되었다가 69일만에 구출된 칠레 광부들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종종 희망을 얘기한다. 희망은 무모할수록 더욱 고도의 인지능력을 필요로 한다. 희망은 우리 인간만의 특권이다. 절망의 2014년을 보내고 2015년을 맞이해, 상처받은 모든 생명에 다시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희망의 촛불을 밝히며 장사익 선생의 ‘희망 한 단’을 함께 듣고 싶다.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희망 한 단에 얼마래요”
“희망이유, 나도 몰라요.”
“희망 한 단에 얼마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