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내가 축구하며 배운 것들
필자는 우리나라 최고 농구 명문 중에 하나인 경복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닌 덕에 농구는 원 없이 해봤다. 허구한 날 학교 도서관은 가방 보관소였고 운동장에서 밤낮없이 뛰었다. 해가 떨어지면 그 무거운 농구대를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있는 가로등 밑으로 옮겨 놓고 계속하다 교장 선생님께 몇 차례 혼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뒤늦게 시작한 축구만큼 나를 사로잡은 운동은 없다. 농구에 대한 충성 때문에 끝내 거부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축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동네 축구’에서는 거의 무조건 잘하는 친구는 공격수, 그리고 좀 처지는 친구는 수비수를 맡는다. 구력이 짧았던 나는 당연히 수비수로 시작했다. 공부는 물론 거의 모든 일에 시간은 가능한 적게 들이고 효과는 극대화하는 걸 지상 목표로 삼았던 나는 때로 그 일에 몰두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수비수로서 분명히 나보다 월등한 기량을 지닌 상대팀의 공격수들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공을 몰고 오는 상대 공격수에게 다가가다가 갑자기 거의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양다리를 벌리고 덤벼들자 거의 백발백중 내 발 어딘가에 공이 걸리는 것이었다. 때론 가운데 급소를 걷어차여 위험한 고비도 몇 차례 넘겼지만 나는 이 전략으로 졸지에 스위퍼 자리를 꿰차기에 이르렀다. 그 후 서서히 실력이 늘어 대학 시절에는 학과 대표로 미드필더나 최전방 공격수까지 해봤다. 이 나이에도 어디서든 축구 하는 사람들만 보면 끼고 싶어 다리가 근질거린다.
지난 여름 브라질월드컵에서 보여준 우리 대표팀의 무기력함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엄격하게 따지고 보면 피파(FIFA) 랭킹이 줄곧 50위권에 맴도는 실력으로 본선에 진출했다는 게 기적이다. 그것도 8회 연속으로. 이제는 기획해야 한다. 그냥 ‘파이팅’만 외치며 땀만 뻘뻘 흘리고 툭하면 정신력에만 호소하는 전략으로는 미래가 없다. 우리보다 기초 체력이 월등한 나라들이 조금만 마음 다잡으면 손쉽게 우리를 능가할 수 있음을 왜 모르는가?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이기기 힘들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조만간 우리랑 똑같이 우리보다 더 열심히 하는 팀에게 질 수밖에 없다. 소니가 삼성에게 넘어졌고 이대로 가면 삼성도 누군가에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왕에 말을 꺼냈으니 아이디어 제안 차원에서 한 가지만 지적하련다. 나는 우리 축구선수들의 패스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친절하고 자상하다. 혹시 내 동료가 못 받으면 어쩌나 조심스레 예쁘게 공을 전달한다. 그렇게 차분하고 배려 깊은 공을 받을 무렵이면 이미 상대 수비수가 코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상대팀 선수는 물론 동료 선수도 정신차리지 않으면 받지 못할 정도의 빠른 패스를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미처 전열을 가다듬을 여유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의 물꼬를 터볼 수 있을 것이다.
축구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 축구계가 늘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혁신의 몸부림을 치는 기업계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는 물론 발로 하는 운동이지만 이제 머리를 써야 한다. 헤딩슛으로 점수를 내자는 게 아니라 이제는 치밀한 분석력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축구 경영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