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전갈과 바퀴벌레의 눈물 겨운 자식 사랑
1980년대 중반 나는 파나마 운하 한가운데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열대연구소에 자주 드나들었다. 원래 산봉우리였던 곳이 운하가 건설되며 물이 차올라 바로 콜로라도(Barro Colorado)라는 이름의 섬이 되었는데 그곳에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열대연구소를 지은 것이다. 나는 그곳에 몇 달씩 머물며 민벌레(zorapteran)라는 희귀한 곤충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전갈 한 마리가 내 발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식탁으로부터 떨어진 음식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뒤로 녀석이 보일 때마다 작은 고깃덩어리를 바닥으로 던져주곤 했더니 머지않아 아예 식탁 위로 기어올라와 가끔씩 밀어주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말았다. 그날 연구소에 막 도착한 한 여학생이 식사를 하다 말고 벽을 등진 채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마침 내 곁을 어슬렁거리던 전갈을 연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인종차별적 언사들을 쏟아냈다. 나는 졸지에 흉측한 애완동물을 공공장소에 데리고 나온 무식한 놈으로 몰리고 말았다. 한번만 더 눈에 띄면 밟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나는 전갈을 툭툭 건드려 문 밖으로 내몰곤 상식 밖의 약속을 했다. 매일 식사 후에 먹을 걸 바깥으로 가지고 나올 테니 다시는 식당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고기를 조금 남겨 식당 모퉁이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오후,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들어섰다. 한번 미워 보이면 하는 짓마다 미워 보이는 법인데, 그 여학생이 식당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이 욕을 하며 지나치려는데 나를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작은 고깃덩어리를 짤막한 꼬챙이 끝에 끼워 웬 전갈에게 먹이고 있었다. 전갈 때문에 욕을 들었던 게 생각나 나도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더니 자세히 보란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전갈의 등에는 조금 연한 색을 띈 한 무리의 작은 전갈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내가 식당 모퉁이에서 기다리던 동안 내 친구 전갈은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친구는 전갈의 모성애에 감탄하여 두려움도 잊은 채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긴 꼬챙이를 가져다주며 전갈은 꼬리 끝에 독침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일러줬다.
우리는 흔히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미워한다. 충분히 알고 나면 저절로 두려움과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싹트는 법이다. 어느덧 저술한 책이 수십권에 달하다 보니 사인할 일이 제법 잦다. 책에 사인할 때마다 내가 언제나 적어주는 말이 바로 ‘알면 사랑한다’이다. 전갈에 대해 아는 게 없을 때에는 그저 징그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그랬던 것처럼 지극한 모성애를 알고 나면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갈 어미는 일고여덟 마리의 새끼들이 자신만큼 클 때까지 업고 키운다.
부엌 서랍에서 튀어나오는 바퀴벌레는 징그럽기 그지 없지만 그들의 자식 사랑 또한 눈물겹다. 알을 여기저기 흩뿌리는 대부분의 곤충들과 달리 바퀴벌레는 알들을 아예 안전한 알집에 넣어 부화할 때까지 꽁지에 매달고 다닌다. 그것도 모자라 알들을 아예 몸 안에 간직하고 부화된 후에야 세상에 내놓는 바퀴벌레 어미도 있다. 이쯤 되면 곤충이 아니라 포유동물 수준이다. 자식 사랑에 관한 한 바퀴벌레의 지극 정성은 전갈을 능가한다. 그런데 이런 지극정성의 모성애를 알고 나서도 바퀴벌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바퀴벌레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곤충학자도 서랍 안에서 홀연 바퀴벌레가 튀어나오자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 ‘알면 사랑한다 이론’에도 예외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