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빈 손 민망하면 장갑 끼고 오세요”

유네스코는 해마다 10월5일을 ‘세계 선생님의 날’로 정하고 교육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은 제각기 다른 ‘스승의 날’을 기린다. 베네수엘라의 1월15일부터 파나마의 12월1일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는 1965년부터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지키고 있다.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95년에는 내 연구실에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다. 5월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부터 내가 실험실 문을 열 때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학생들이 황급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심각한 논의를 하는 듯 보였다. 며칠 후 교수가 되어 처음으로 맞은 스승의 날이 되어서야 나는 그들이 그동안 무얼 하느라 그리도 고심했는지 알게 되었다. 예쁜 카드와 함께 그들이 건넨 선물 포장 속에는 스웨터가 들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이 사준 스웨터를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아내가 비명을 지른다. 그 촌스러운 걸 입고 나갈 거냐고. 사실 그 스웨터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자들이 사준 것인 만큼 우기고 입었다. 물론 그 날 하루뿐이었지만.

학생들의 고민은 이듬해 더 커졌다. 지난해에 사준 스웨터를 내가 딱 한 번밖에 입지 않았으니 말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고민하지 말고 해마다 스승의 날에는 그냥 와인 한 병만 사달라고. 그 날 이후 내 연구실에는 와인이 쌓이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씩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내 연구실을 찾는 손님도 늘기 시작했는데 빈 손으로 오기 민망한지 자꾸 선물보따리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아주 작고 부담 없는 선물이라면 모를까 나는 그들을 죄다 돌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모두 와인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내가 부담스러운 선물은 받지 않으려 하자 방문하기 전에 실험실에 전화를 하고 상의한 모양이었다. “우리 선생님은 스승의 날 우리들에게도 그저 와인 한 병만 받습니다”라고 했단다.

그러나 나는 몇 년 전부터 내가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물론 거짓 소문이다. 나는 여전히 와인을 좋아한다. 1990년대 중반 내가 귀국했을 무렵에는 아직 우리나라에 와인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그래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와인들이 거의 다 몇 만 원대였다. 사실 나는 와인을 좋아할 뿐 와인에 대해 잘 모른다. 그저 텁텁하고 거친 와인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나는 지인의 생일에 미처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터라 연구실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와인 한 병을 들고 갔다가 그게 무려 50만원이 넘는 와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제자들에게 그저 한 사람에 2~3천원씩만 내면 스승의 날 선물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줄 알고 시작한 ‘소박한 전통’이 어느새 뇌물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꾸 소박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서글프다. 물론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주는 선물은 부담스러워야 한다. 그래서 밤톨 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고 장미도 한두 송이가 아니라 그야말로 ‘백만 송이’를 선물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마음만 주고받아도 되는 사이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뭔가를 주고 싶다면 그저 몇 만 원짜리 와인 한 병을 들고 와도 좋은 그런 사이. 오늘도 나는 예의상 뭔가를 들고 들어오는 손님에게 썰렁한 농담을 한다. “빈 손으로 오시기 민망하시면 장갑을 끼고 오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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