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다문화·고령화 접어든 대한민국, 과연 변했는가
[아시아엔=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국립생태원 원장] 동물들은 계절이 변하는 것을 우리보다 훨씬 민감하게 알아차리지만 아마 햇수를 세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처럼 10주년이나 100주년 등을 기리고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등 우스꽝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인간은 수학을 개발해 그를 기반으로 온갖 과학기술을 발달시킨 묘한 동물이다. 게다가 십진법을 가장 보편적인 기수법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이를 테면 7주년이나 13주년보다 10주년에 훨씬 각별한 의미를 둔다.
우리말에는 10년을 강조한 속담이 제법 많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를 비롯해 “10년 세도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 “10년 묵은 환자(還子)도 지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10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 등등. 영어에는 아예 10년을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 라틴 기원의 ‘데케이드(decade)’는 일상에서 10이라는 숫자를 거론하지 않고도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다. 2015년 올해는 유엔이 정한 ‘생물다양성 10년(United Nations Decade on Biodiversity)’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그런데 정작 단어까지 만들어 놓고는 이렇다 할 속담이나 격언은 별로 없다. 딱히 단어도 없는 우리는 이런 저런 속담을 되뇌는데 단어까지 만든 서양은 그렇지 않아 적이 야릇하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10년이라는 세월이 사뭇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2015년 올해는 특히 그런 것 같다. 올해는 내가 우리 사회에 ‘통섭’을 화두로 던진 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지난 10년 동안 경계를 낮추고 넘나들어야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통섭의 개념은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고, 통섭은 어느덧 지하철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일상용어가 되었다. 통섭의 전파에 가장 탁월한 역할을 담당한 책 <대담>의 10주년 기념 개정판이 얼마 전 출간됐다. 지난 2001년부터 4년 동안 나는 당시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도정일 선생님과 무려 10여 차례에 걸쳐 장시간 대담을 나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이 보였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당돌한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10년, 우리 학계와 사회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다시 한번 짚어보기 위해 우리는 금년에 또 두어 차례 만남을 가졌고 그 자료를 보태 개정판을 냈다.
<통섭>과 <대담>에 덧붙여 2005년에 나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그저 174쪽의 얇은 문고판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라는 책을 냈다. 현상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대체출산율 2.1의 절반밖에 안 되는 출산율이 몇 년 째 이어지는 데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경종을 울릴 셈으로 쓴 책이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앞서간다는 비판만 잔뜩 뒤집어썼다. 그러나 최근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한 몇몇 주장들이 사뭇 어설픈 정책으로 둔갑해 여기저기에서 불거지고 있어 적이 당황스럽다. 이 책에서 내가 일찌감치 강력하게 주장했던 임금피크제는 지금 공공기관 전반에서 시행 단계에 들어갔고, 정년제도가 없어질 것이라는 내 예언(?)은 정년 연장의 형태로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저출산이 당황스러운 현상이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지구 만병의 근원인 인구 증가를 어느 정도 잡는가 싶던 순간에 또 다시 잘 사는 나라들이 자국민의 수가 줄어드는 걸 우려해 출산율을 높이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구의 증가가 아니라 인구의 이동이 현명한 해결책이라는 분석과 함께 나는 10년 전 이 책에서 우리나라도 이민의 문호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에는 단일민족의 전통을 훼손한다며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버젓한 다문화국가가 되었다. 책에서 나는 또한 출산율을 정상화하는 방안으로 조혼을 예찬하고 그러기 위해서 젊은이들의 사회 진입을 앞당기기 위해 교육제도를 5-5-5제로 하자고 제안했다. 초중등 과정을 각각 1년씩 줄이는 제안이었다. 최근 정부가 사뭇 비슷한 내용을 설익은 정책으로 발표하는 걸 보며 물론 상관은 없겠지만 공연히 혼자 황망스러워 하고 있다.
통섭의 개념은 상당한 논의와 비판을 거쳐 무르익었지만 고령화 대책은 전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튀어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