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참어른’ 없는 우리사회 걱정된다
세월호 참사의 여운이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사고가 일어난 지 두 달이 넘었건만 아직도 11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도대체 언제 그들이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지, 과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오기는 할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번 일을 겪으며 우리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안전불감증, 안전시스템의 부실, 생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극도의 배금주의 등 속살을 보며 총체적인 무기력함에 빠져들었다. 결코 애도를 멈춰서도 부조리를 잊어서도 안 되지만,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 또는 방관자로서의 죄책감에 어쩌지 못하는 우리 모두 이제는 새로운 삶을 기획해야 하건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듯 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음을 통감한다. 단순히 아이의 반대 의미의 어른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이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그런 어른 말이다. 그런 분이 꼭 종교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를테면 김수환 추기경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쯤 우리는 그 분의 말씀 한 마디에 함께 위로도 받고 아울러 용기도 낼 수 있을 것 같다. 사석에서는 얼마 전부터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래야 이 나라 경제가 도탄에 빠지지 않고 돌아갈 것이라는, 여전히 배금주의적 부연 설명까지 달아서. 그러나 현실은 공개적으로 그런 얘기를 해서 국민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는 분이 지금 이 땅에 단 한 분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이 그 무엇보다도 서글프고 또한 두렵다.
인터넷의 발달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절대신임의 존재를 잃었다. 아무런 흠 없이 청문회를 통과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더할 수 없이 청렴한 줄 알았던 사람들조차 줄줄이 더러운 속살을 드러내는 걸 보며 한없는 자괴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나는 청문회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발견하면 그 경중에 상관없이 후벼 파내어 기어이 각혈을 하게 만드는 야비한 청문회를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또한 충분한 역사를 축적해야만 이를 보고 자란 다음 세대는 언젠가 공직에 나가 국가에 봉사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바른 생활을 살며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될 것이다.
2008년 겨울 우리 일간지에도 11월28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100세 생신을 맞은 세계적인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댁으로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대학자 앞에 다소곳이 앉아 경청하는 그의 모습에서 프랑스의 문화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처럼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나라는 결코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국에는 사뭇 까칠하긴 해도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건재하며 미국 국민은 언제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세계인의 존경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 사회가 어떤 분을 존경하게 되는 과정에는 우선 그 분이 존경 받을 만한 분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런 분이 등장할 풍토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정치가 지성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친히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혜안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면 국민도 함께 머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일 것이다. 어른도 자꾸 모셔야 어르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