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호 아저씨! 당신을 존경합니다”
[아시아엔=최재천 칼럼니스트] 어렸을 때 우리는 호치민을 그저 “공산당 나쁜 놈”으로만 배웠다. 우리가 호치민을 히틀러나 무솔리니, 짐바브웨의 무가베, 리비아의 카다피보다 더 극악무도한 독재자로 혐오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우리 군대가 피를 흘리며 싸우던 적군 베트콩의 수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10여년 전 처음 베트남에 갔을 때였다. 개미를 연구하는 하노이대 연구원의 안내로 시내관광을 하던 중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호치민을 모셔놓은 프랑스풍의 거대한 영묘 건물이 있었다. 안내하던 베트남 친구가 잠시 참배를 하고 와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고는 손님을 길에 세워두고 긴 줄에서 한참을 기다려 절을 하고 돌아왔다. 유사 이래 독재자라는 족속들은 죽어서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구나 싶어 그 친구가 내심 안쓰러웠다.
그로부터 몇 년 후 2003년 봄 어느 날 푸른숲출판사 사장님이 새로 나온 책이라며 두툼한 책 한권을 보내왔다. 200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윌리엄 듀이커(William J. Duiker) 교수가 쓴 <호치민평전>의 우리말 번역서였다. 어느덧 우리 사회도 많이 개방되어 “공산당 나쁜 놈”의 평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야릇한 스릴과 함께 몇 년 전 나를 두고 참배를 다녀오던 베트남 친구도 생각나고 하여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나는 그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며칠 후 책을 덮으며 나는 그 “공산당 나쁜 놈”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베트남 사람들이 호치민을 가리켜 “호 아저씨”라고 부르는지, 그리고 그 친구가 나를 길에 세워두는 무례를 범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듀이커는 영어권에서 제대로 된 호치민 전기가 나오지 않은 이유를 그를 둘러싼 이슈들 중에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들이 특별히 많았고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호치민은 평생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으며 50개 이상의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가 쓴 많은 편지, 기사, 보고서 등은 모국어인 베트남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으로 되어 있어 실제로 그가 쓴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호치민의 이 같은 팔색조 스타일에 대해 듀이커는 단순히 들킬 걸 염려한 비겁함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조국 독립을 되찾아야겠다는 일념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한다. 한 마디로 그는 ‘영리한 혁명가’였다.
호치민은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과 달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가 아니라 끊임없는 설득과 합의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지도자였다. 그는 군림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던 지도자였다. 지금도 하노이 시장에 가면 호치민이 시민들과 함께 즐겨 먹던 국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거의 꿀꿀이죽 수준의 서민음식이라는데 직접 먹어본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도 두 번 다시 못 먹을 것 같다며 손사래를 친다.
우리 주변에는 선거철에 표가 필요할 때에만 굽신거리고 일단 당선되고 나면 안하무인으로 거들먹거리는 정치지도자들 천지다. 호치민은 자신의 권위와 부귀를 위해 살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국민을 위해, 때론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며 온갖 개인적인 굴욕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 정치계에도 ‘호 아저씨’가 몇 분 계셨으면 하고 바라면 지나친 욕심일까? 입으로만 국민의 공복이라 떠들지 말고 진심으로 국민을 섬기는 정치인들을 보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9월 2일)은 45년 전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나 역시 하던 일 멈추고 그의 성전에 머리를 숙인다. “호 아저씨, 당신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