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아시아엔=최재천 국립생태원장] 먼 옛날 동굴에 살던 두 가족의 이야기이다. 한 가족은 대단히 까다롭고 엄격한 어르신을 모시고 살고 다른 가족은 대체로 마음이 편안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까다로운 어르신이 있는 동굴에서는 한밤중에도 용변을 늘 바깥에 나가 봐야 하고 사흘이 멀다 하고 동굴 청소를 해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용변을 보러 나갔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고 나무 열매를 따고 사냥을 할 시간도 모자랄 지경인데 허구한 날 건강하고 쾌적한 주변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산다. 그런가 하면 건너 편 동굴에 사는 이들은 하루 종일 열매도 거둬들이고 사냥도 실컷 하여 비교적 배불리 먹고 산다. 해가 지면 용변도 적당히 동굴 으슥한 곳에서 해결하곤 한다. 편안하게 사는 것은 좋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동굴에서는 악취와 병균으로 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동굴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지면 깨끗한 새 동굴로 이사를 가기만 하면 된다. 구태여 주변 환경을 보호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까닭이 없다.

이 이야기는 물론 디킨스(Charles Dickens)의 ‘두 도시 이야기’를 패러디한 것이다. 하버드 대학 시절 나의 스승인 윌슨(E. O. Wilson) 교수는 우리 인간에게 ‘생명 사랑(biophilia)’의 본능이 있다고 설명한다. 존경하는 스승님이지만 나는 이 점에 관한 한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평범한 한 종의 영장류에서 오늘날 이 지구를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보다고 탁월하게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개발할 줄 아는 능력 때문이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게끔 진화한 동물이다. 다만 우리의 경쟁 상대가 이제 더 이상 그 어느 다른 동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옮겨갈 동굴이 없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농촌 작가 고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을 새기며 나는 10년 전부터 인간의 학명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共生人)으로 개명하자고 부르짖어왔다. 호모 심비우스의 생물학적 기본은 생태학과 진화생물학에 있지만, 그 개념은 동양과 서양의 고대철학 모두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우리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일컬었다. 논어(論語)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남과 사이 좋게 지내지만 무턱대고 한데 어울리지는 아니한다’는 정신을 얘기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화이부동 하지만, 소인은 정반대로 한다”고 했다. 인간은 분명 자연이 창조해낸 가장 위대한 걸작 중의 하나이다. 급기야 우리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현명한 인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가장 탁월한 두뇌를 지닌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우리가 진정 현명하다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지는 말았어야 했다. 생태학자인 내 눈에는 자꾸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동물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독존(獨存)이 아니라 공존(共存)이다. 하나밖에 없는 이 지구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모든 생명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워 실천하는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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