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손을 잡아야 살아남는다
생태학자들은 자연생태계의 종간 관계를 흔히 2×2 분할표로 정리한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해가 되는 관계가 ‘경쟁’이고, 득이 되는 관계는 ‘공생’이다. 한 종은 이득을 보고 다른 종은 손해를 보는 관계로 ‘포식’ 또는 ‘기생’이 있다. 그러나 나는 경쟁을 다른 관계와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분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그걸 원하는 존재들은 늘 넘쳐나는 상황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은 맞붙어 상대를 제압하는 것 외에도 포식, 기생, 공생 등을 고안해냈다. 자연의 관계구도를 이처럼 입체적으로 조망하면 나를 둘러싼 모든 상대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자연계에서 가장 무거운 생물집단이 누구일까? 그건 고래나 코끼리가 아니라 꽃을 피우는 식물 즉 현화식물이다. 이 세상 모든 동물을 다 합쳐도 식물 전체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지구는 누가 뭐래도 식물의 행성이다. 자연계에서 수적으로 가장 성공한 집단은 누구일까? 단연 곤충이다. 그렇다면 곤충과 식물은 과연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뒀을까? 한곳에 뿌리를 내리는 바람에 움직여 다닐 수 없는 식물은 꽃가루받이를 위해 애써 꿀까지 제공하며 ‘날아다니는 음경’을 고용하며 공생 사업을 벌였다. 곤충과 식물은 결코 호시탐탐 서로를 제거하려는 무차별적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게 아니다.
지금 이 지구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지주가 누구인가? 바로 벼, 보리, 밀, 옥수수 등 곡류식물이다. 불과 1만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 들판에 말없이 피고 지던 잡초에 불과하던 그들이 무슨 재주로 졸지에 대지주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건 다름 아니라 우리 인간이 그들을 경작해주었기 때문이다. 25만년 전 등장해 사자와 하이에나에 쫓기며 아프리카 초원을 헤매던 하잘것없는 한 종의 영장류였던 인간이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계에서 가장 대규모 공생 사업을 벌여 성공한 데 기인한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는 스스로 자연과 더 이상 아무런 상관없이 사는 존재라고 착각한다.
인간은 분명 자연이 창조해낸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다. 그러나 먼 훗날 우리가 멸종한 다음 또 다른 지적인 동물이 만일 ‘인간실록’을 편찬한다면, 나는 그 제목이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며 짧고 굵게 살다 간 동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물학자들은 종종 부질없는 내기를 벌인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과연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만큼 살 수 있는가 하는 내기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 25만 년을 더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비관적 전망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터득한 경쟁적 협동 즉 경협(競協, coopetition)의 지혜를 되살리는 일이다. 짐작하겠지만 ‘coopetition’은 cooperation(협력)과 competition(경쟁)의 합성어이다.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상호허겁(相互虛怯, mutual cowardice)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고 설파했다. 손을 잡아야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 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