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칼럼] 찍찍이의 원조 ‘의생학’
연못 가득 활짝 펼쳐놓아도 연꽃잎에는 좀처럼 먼지가 쌓이지 않는다. 잎의 표면에 돋아 있는 수천 분의 1밀리미터 크기의 미세돌기들 덕택에 별나게 동글동글 맺히는 물방울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먼지를 씻어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여 카이스트 생명화공학과 양승만 교수팀은 청소할 필요 없는 전광판이나 김이 서리지 않는 유리창을 제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미세구슬’을 개발했다.
2012년 4월에는 포스텍 화학공학과 차형준 교수팀이 2007년 자신들이 발견한 홍합의 접착물질보다 두 배나 더 강력한 생체 접착제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홍합은 접착단백질을 분비하여 그 모진 파도에도 끄떡없이 바위에 붙어산다. 이번에 개발한 생체 접착제를 이용하면 실로 꿰매지 않고도 수술 부위를 봉합할 수 있단다.
나는 이처럼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자연이 스스로 풀어낸 해법을 가져다 우리 삶에 응용하려는 일련의 연구들에 ‘의생학(擬生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여기서 ‘의(擬)’는 ‘헤아릴 의’자로 ‘의성어’나 ‘의태어’의 첫 글자이다. 따라서 의생학은 ‘자연을 흉내 내는 학문’이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자연을 표절하는 학문’이 된다.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지혜를 얻은 것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랴마는 본격적인 의생학의 효시는 찍찍이(Velcro)의 발명으로 볼 수 있다. 우리들 가방이나 신발에 붙어 있는 찍찍이는 원래 몇몇 식물들이 자신의 씨를 동물의 털에 붙여 멀리 이동시키려고 고안해낸 구조를 스위스의 발명가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이 표절한 것이다.
나는 의생학이 생물의 화합물이나 미세구조를 베끼는 생체모방(biomimetics)의 수준을 넘어 자연 생태계의 섭리(eco-logic)마저도 응용할 수 있기 바란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초음파를 쏘아 보내고 그것이 반사되어 돌아오는 걸 감지하여 장애물을 피해 다니는 박쥐의 반향정위(echolocation)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시각장애인에게 초음파 지팡이를 만들어줄 수 있고, 흰개미로부터 친환경 건축기술을 배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의생학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자연의 아이디어들을 염탐하러 다닌다. 우리끼리 표절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자연을 표절하는 것은 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