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칼럼] 히딩크 감독은 나의 또다른 도전

2012년 7월4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2002 월드컵 10주년 기념식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과 인사하고 있다.

2012년은 내게 도전과 보람, 그리고 감사와 또 다른 도전의 한해였다. 연말이 되니 여기저기서 송년회 초청이 많이 온다. 하지만 최대한 절제하는 게 내 오랜 습관이고 하나의 원칙이다. 한해를 돌이켜보며 내년을 차분히 설계하고 준비하는 게 바로 이맘 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라준 선수들과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신 국민들 덕택이다. 또 내 이름을 걸고 출범한 장학재단이 올해로 10년을 맞은 것은 크나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그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축구장을 누비고, 또 자신들의 후배들에게 나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일 것이라고 믿는다. 내년부터 경기 중 사고를 당하였을 때 응급조치를 대한적십자사 등과 함께 펼쳐 나가기로 한 것도 올해 나를 기쁘게 한 일 가운데 하나다.

큰 아들 성민이가 지난 여름 조그만 미술전시회를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확실히 깨닫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하다. 다만 주변에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소원이나 소질과 상관없이 부모들 바람대로 끼를 살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나는 내년 초 또 한번 새로운 길에 도전하려 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 곁으로 가서 축구를 더 배울 결심을 한 것이다.

내년 1월부터 안지 마하치칼라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히딩크 감독 아래서 지도자 연수를 받게 될 것 같다. 아직 구단의 최종 결정은 나지 않았지만, 히딩크 감독의 승낙을 받아 설레는 마음이다. 히딩크 감독과 나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감독과 주장 관계였지만, 한때 나는 선수은퇴까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 뒷 부분을 읽으시면 ‘아, 그랬었구나’ 하고 독자들께서 이해해주실 거라 믿는다.

나는 2001년 이후 히딩크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아직도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게 정말 많다. 내가 처음 히딩크 감독을 만난 것은 2001년 1월 합숙훈련 숙소였던 울산 현대호텔에서였다. 일본프로팀 가시와 레이솔에서 뛰다 월드컵대표팀에 뽑혀 귀국했을 때였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는 콧수염이 있었는데, 울산에서 만났을 때는 없어 인상적이었다. 국가대표팀 소집일 저녁 숙소에서 만난 그는 한국에 대해 낯설어하는 게 역력했다. 소집 이튿날 개인면담에서 그는 “한국선수들의 기본적인 부분을 존중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아직도 내 귓전에 남아있다. ‘기본적인 것에 대한 존중’은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긴 참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빠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2002년 2월 어느 날 박항서 코치가 불렀다. 박 코치는 “어린 선수들을 이끌어줄 구심점이 필요한데 합류할 수 있겠나? 다만 경기에 못나갈 수도 있다”고 했다. 몸 상태를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고 단지 분위기 메이커로 부른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정중히 말씀드렸다. “지금 대표팀 베스트멤버가 정해져 있고 저를 분위기 메이커로 삼을 거라면 안 가겠습니다. 그러나 주전경쟁을 통해 베스트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2002년 3월 초 월드컵을 3달 여 앞두고 대표팀 유럽전지훈련에 합류했다. 9개월 만에 복귀한 것이다. 유럽 전지훈련 터키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러 가다 히딩크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소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유럽 전지훈련에서 아픔을 꾹 참고 뛴 것이 인정받은 듯했다. 지난 반년간 부상으로 고심하던 기억이 눈 녹듯 사려져 가는 순간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에게 패스 슈팅 전술 등에서 기본기를 무척 강조했다. 또 공이 가는 곳에 선수 숫자가 우세해야 한다는 단순한 축구진리를 강조하곤 했다. 또 하나 내가 가르침을 준 게 있다. 체력테스트였다. 히딩크 감독 이전 대표팀의 체력훈련은 많이 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가슴에 맥박을 재는 띠를 두르고, 손목에는 심장박동수를 볼 수 있는 시계를 채우는 것이었다. 또 정해진 룰에 따라 뛰면서 지구력, 회복속도 등을 체크했다. 무조건 뛰는 게 아니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것을 그때 나는 깨닫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딩크 감독은 무슨 일이든 공정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었다. 특히 선수선발과 배치에서 그랬다. 그는 1990년 처음 월드컵대표팀에 뽑힌 내게 어드밴티지를 주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 대신 정정당당히 경쟁해서 주전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나의 길지 않은 지도자 생활에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히딩크 감독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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