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낙산사 오현스님의 ‘죽비’와 ‘빙그레’

낙산사의 조오현 스님 <사진 최영훈>


불교계도 나라도 진흙탕 싸움질…큰스님 부재의 그늘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 <삼국지연의>는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등과 함께 제갈량에 대한 헌사와 일화로 가득하다. 팩트와 무관한 허구(Fiction)들도 숱하다. 중달은 조조 사후, 위를 이은 진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틀을 세운 경략가 사마의의 자(字)이다.

8월 31일 100일 만에 낙산사를 여름 휴가 차 다시 들렀다. 완도 출신, 일념 스님 안내로 점심 공양부터 하러 갔다. 불사추진위원장 일원 스님과 담소를 하며 맛나게 먹었다. 무산 대종사 5주기 때 부도탑 제막 얘기도 화제에 올랐다. 그후 절에 신도들과 관광객들 발길까지 인산인해를 이룬단다. “다 큰스님의 높은 원력 덕분이지요. 입적하시고도 우리를 도우시니…”

사마의

뜬금없이 죽은 공명에게 놀라, 몇십리 밖으로 달아난 사마의 얘기를 꺼낸 이유다. 일원 스님은 나지막히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가 속한 조계종 제3교구 비전을 얘기했다. 백담사 회주 삼조 스님을 중심으로, 세계적 불교문화센터의 본산으로 만들겠다는 거다. 총무원장 스님도 관심을 갖고,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제3교구에 힘을 실어주시는 듯하다.

큰스님 상좌 출신들 중 일원 스님은 맏이 격이다. “삼조 스님은 예외고, 큰스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일’ 자를 많이들 씁니다.” 그는 밥 먹는 자리이건만 깊은 탄식을 토했다.

“큰스님 문하인 우리들이 좀 더 살피고 잘했더라면…” 큰스님 원력으로 겨우 중심을 잡는다는 자성이었다.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에는 무산 대종사 그늘이 아직도 깊다. 조오현 큰스님은 좌우나 승속 가리는 법이 없었다. 선풍도골을 강조했고, 빼어난 선시들도 썼다. 사람과 문학을 사랑한, 탈세 간 너른 품이었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사진 최영훈>

낙산사 명물 해수관음상을 공중으로 몇 미터 띄워 올리는, 조감도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거기서 수십 미터 동해 바다에 면한 쪽, 무산 대종사의 좌상이 천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손에 든, 앙증맞은 차곡차곡 잔은 큰스님의 상징이다.

생전의 조오현 스님

조오현 스님은 10년 전 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주장자를 들고, “하ㅡ알” 외치며 강의를 시작했다. 낙산사에는 큰스님의 자취가 도처에 있다. 신흥사 백담사에도 선풍을 진작한 반세기의 흔적들이 숱하다. 무엇보다 글줄 깨나 쓰고, 나라 다스린다 어깨 힘준 이들에게 때로 은혜의 말씀, 때로는 무언의 죽비를 내리셨다.

며칠 전, 큰스님과 4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온 김진선 전 강원지사 걱정을 들은 바 있다. 왼쪽 눈만 뜨고, 기성 불교계를 유튜브 난도질 한 것에 충격을 심하게 받은 모양이다. 권불 10년, “닭벼슬보다 못 한 중벼슬 놀음”(생전 큰스님 말씀)에 골몰하다 망신살이나 뻗치니…

아귀다툼을 큰스님이 보셨다면, 백담사로 불러 타이르거나 치도곤을 내려 중재했을건만…승속 간이 어지럽고, 큰어른 부재가 선명하다. 속명 조오현 큰스님은 가고 없으시니, 이머꼬? 최근 만해축전이 열렸지만 발길도 많이 줄었다. 설악 선원들에 선풍부터 다시 세우시라, 그리고 불교문화도 더욱 융성하게 하시라.

휴가 이틀째, 설악에 안개는 걷히고 뭉게구름들이 하늘 캔버스를 신비롭게 꽃피웠다. 무산(霧山), 안개산!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지만, 그는 가고 없다. 누군가 스님과 인연이 있다며 스님의 오도송을 보냈다.

“오현스님 입적하던 날 종일 그분의 오도송을 묵상했더랬지요. ‘천경만론이 다 바람에 이는 파도’라고…”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쟁론들이 다 바람 불면 일었다 사라지는 바다 물결이라고 말이다.

부도탑은 원래 종이나 럭비공 모양이다. 낙산사 사리탑은 큰스님 시조 ‘파도’를 새겨놓은 비석 윗부분 사각에 작은 돌탑만 넣었다. ‘밤 늦도록 책을 보다가/ 밤 하늘을 바라보다가’로 시작하는 ‘파도’ 말이다.

무산 대종사 큰스님이 산사에서 동해바다 올음을 들으며 쓴 ‘깨달음의 노래’. 시비 옆, 큰스님의 좌상은 언제 봐도 정겹다. 멀리 설악을 보며 오른손에는 잔을 들고, 다리를 꼬고 앉은 천진한 모습이다.

김경민 작가의 작품이다. 등신대에다 색까지 칠해 큰스님이 동해를 배경으로 앉아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큰스님 옆에서 무엄하게도 어깨를 감싸안듯 찍었다. 낙산사 표받는 곳, 입구쪽 큰 소나무가 쓰러져 누웠다. 가로누운 소나무 뿌리는 대지에 박혀 뽑히지 않은 채다. 가로, 스러져누운 저 큰 소나무를 꼭 살려 일으켜 세우라는 큰스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 환청이다.

스러져가는 설악 무문관의 선풍도 되살리고, 쇠락하는 만해마을도 활기차게 만드시라. 동종까지 모든 게 타버린 18년 전 대화재, 그때도 살아남은 기적의 홍련암. 그곳에서 촛불공양 기도도 했다. 국태민안과 가족의 무탈·평안을 빌고 또 빌었다. 감로수 옆인가 웃고 있는 녹색 돌두꺼비를 만지면 꿈이 이뤄진다니, 세번이나 만졌다.

낙산사에 이어 신흥사 입구 권금성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10여년 만에 다시 타보았다. 눈이 휘황하다. 기암괴석들과 아슬 뿌리내린 소나무 생명력에…소나무들을 보면서 낙산사 의상대 위 솟은, 벼락 맞고 살아난 명품 소나무 자태가 아른거린다.

거기서 울산바위 뒤태를, 아니 옆태라고 해야 할까? 역시 그 위용이 늠름하다. 왜 울산바위에 히브리 고대 왕궁이자 요새였던 마사다가 겹칠까? 이스라엘 남부, 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 말이다. A.D 72-73년, 끝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던 유대 전사들이 로마군에 패배가 임박하자 전원 자결했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9월 초하루엔 미시령 아래 화암사로 갔다. 금강산을 더 가깝게 느끼다 왔다.

2005년 4월 산불로 폐허가 됐던 낙산사


#뱀발…낙산사 약전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낙산사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명소이자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다.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한국 3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이 아름다운 사찰은 관동팔경 중 한 곳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고전과 시문에서 그 아름다움을 시인묵객들이 전했다. 낙산사는 여러 번 중건과 복원을 거친 역사적 사찰로 문화재도 많다. 16m 높이의 해수관음상, 해안 절벽 위의 정자로 일출 명소 의상대, 바다를 굽어보는 홍련암이 대표적이다. 원통보전 앞 칠층석탑, 진신사리가 발견된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및 사리장엄구일괄(이상 보물)도 유명하다.

2005년 큰 산불이 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동종을 비롯해 20여 채의 전각이 모두 소실된 바 있다.

양양 낙산사 <사진=위키피디아>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