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산책] ‘권상연성당’ 축성, 박대성-정미연의 ‘집념’

권상연성당 내부

췌장암 무릅쓴 정미연의 성미술 작품들로만 채운 첫 순교자성당
지애비 소산 박대성 화백, “인명은 재천”이라며 작품제작 응원

“목숨은 하늘에 달린 거다. 그래서 하라고 했지요.” 소산 박대성 화백은 매몰차게 아내에게 말했다. “전쟁 났다고, 다 죽는 거냐?”라고도 응원했다.

2023년 9월 2일 전북 전주의 ‘권상연성당’이 문을 열었다. 순교자 권상연을 기리는 성당 축성이 거행됐다. 성당 내 200여 동상과 성화,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박대성 정미연 부부 <사진 가톨릭신문 이우현 기자>

한 작가가 오롯이 도맡아 제작을 마쳤다. 한국 가톨릭사 첫 순교자 성당이라 더욱 뜻 깊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소산의 아내 정미연 작가였다. 성당 성미술을 한 작가가 전담한 건, 극히 드물다. 앙리 마티스가 프랑스 남부의 로사리오성당 성미술을 도맡긴 했다.

소산은 암투병 중인 아내가 권상연성당의 성미술을 도맡게 돼 걱정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소산은 매섭게 아내를 몰아세웠다. 그는 어릴 때 한쪽 팔을 잃는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불운을 이겨내고 고 이건희 회장의 마음을 살 정도로 동양화단에서 위상을 드높였다.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괄목할 전시도 했다.

미국 유수의 대학들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연구해 책으로 펴내기도 했을 정도다. 불굴의 집념으로 똘똘 뭉친 동양화단의 거목이다. 정미연은 지아비 응원으로 명작을 탄생시켰다. 권상연성당은 조명이 꺼졌을 때, 더 감동적이다.

문을 열면 정면 ‘빛의 십자가’가 은은하게 맞는다. 벽면을 십자로 뚫어 빛의 통과로 생기는 것이다. 프리처커 상 안도 타다오에게서 영감을 받았을까? 자세히 보면 그 십자가 앞에 사람 형상이 보인다. 대못에 박혀 매달린 십자가의 예수를 연상시킨다. 밑에서 올려다본 그 얼굴엔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빛의 교회’에서 힌트 얻은 창조적 변용인 듯하다. 빛과 조각이 하나로 어우러진 십자고상(苦像). 성당 좌우에는 세로로 홀쭉한 창이 7개씩 나 있다. 왼쪽에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삶과 순교, 시복식 장면이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졌다.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화폭에 담았다. 입구쪽 2층에는 부활한 예수를 따르는 군중이다.

<사진 최영훈>

그것을 그려낸 스테인드글라스가 미사를 마친 신자를 배웅하는 듯 연출했다. 이 모두를 한 사람이 다 만들다니 놀랍다. 성당 안팎의 성미술들이 하나로 다가온다. 이 성당에는 영성의 신비와 은총이 짙게 감돈다.

무엇보다 이를 감동으로 옮긴 성미술 덕분일 테다. 박상운 신부와 정 작가가 마음을 모으고 정성도 기울였다. 박 신부가 효자4동 성당에 부임한 것은 2020년 초. 주변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로 인구가 늘면서 성당을 새로 지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2021년 3월, 전주교구 초남이성지에서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의 유해가 발굴됐다. 가톨릭계로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윤지충·권상연은 명문가 출신의 사촌간이었다. 나란히 천주교 신자로 된 후, 신주를 불살라버렸다. 대역죄로 몰려 1791년 전주 남문 밖 형장에 섰다. 망나니의 거친 단칼에 몸이 나뉘어 이슬로 됐다. 한국 천주교사의 최초 순교기록을 쓰게 된 거다. 이들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은 받았지만, 유해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의 유해는 2021년 기적처럼 발견된다.

박 신부는 “최초 순교자를 기념하자”고 건의했다. 먼저 건축 중이던 서곡성당은 ‘윤지충’, 효자4동 성당은 ‘권상연’으로 이름을 정했다. 윤지충·권상연·윤지헌 순교자의 유해도 모셔왔다. 건축설계 콘셉트도 ‘순교자 기념’으로 바뀌었다. 내부를 꾸밀 성미술도 일반 성당과는 달라야 했다. 그때 박 신부 뇌리에 떠오른 이가 정미연 작가다.

‘테레사’가 세례명인 정 작가는 서울·대구·전주·원주·제주 교구의 주보에 성화를 연재했다. 내가 방문한 소산 화백의 경주 자택 곳곳에도 빼어난 성미술 작품들이 눈을 붙들었다. 자택 뒤뜰,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쓰러지는 수난의 과정을 동판에 감동적으로 담았다. 2층 희귀 작품 전시실에서 목격한 성모 마리아를 그린 대작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정 작가는 박 신부와 전북 익산 여산성지의 성미술 작업도 함께 한 인연도 있었다. 작품 의뢰 연락을 받았을 때 정 작가는 췌장암 수술 후 항암 치료를 열두 번이나 했다. 기력이 쇠잔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항암 치료 중 방울방울 떨어지는 링거를 보면서 ‘고통을 통해 주님이 당신을 더 가까이 부르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정 작가는 그런 마음을 담아 작품을 만들었다.

정 작가의 성미술에선 예수와 성모, 순교자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치유가 느껴진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대가 조광호 신부, 박장근 조각가 등 전문가들의 도움도 받았다. “암투병 뒤여서 더욱 작품들에 애착이 간다”(정미연)고 했다. 박 신부는 성당들을 돌면서 순교사를 강론해 건축비에 보탰다. “성당이 순교의 기억과 함께 치유의 공간이 됐으면 한다”(박신부, 정 작가)

#뱀발…한국 천주교 순교 약사略史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왼쪽부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2014년 제작한 초상화. <주교회의 제공>

순교자 권상연은 1791년 아홉살 연하의 고종 사촌동생 윤지충과 함께 순교했다. 윤지충 모친상 때 베이징 주교의 지침에 따라 제사를 올리지 않고 위패를 불살랐다. 권상연도 사당에 모시던 조상의 위패를 불살랐다.

조정은 두 사람을 대역죄인으로 참수형에 처했다. ‘신해박해’로 불린 가톨릭 순교 발자취는 진하다. 이 사건은 천주교 박해의 신호탄이었다.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도 함께 몰락했다.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유항검은 사촌지간 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신앙공동체를 일궜다. 1784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을 찾은 이승훈은 현지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다. ‘베드로’로 세례까지 받았다.

귀국길에 교리서적과 십자고상, 묵주를 갖고와 이벽·권일신·정약용에게 세례를 해줬다. 남산 아래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모임을 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자생적 천주교회 탄생이다. 한국 천주교는 명문가 혈연 네트워크로 확산됐다. 다산 정약용 가문이 단연 중심이었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다산의 자형, 백서사건의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사위였다.

첫 순교자 윤지충은 다산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다산에게서 교리를 접하고, 이승훈에게 세례받았다. 윤지충과 함께 순교한 권상연은 윤지충 외사촌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후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땅에 매장한 유항검. 그 역시 윤지충과 이종사촌 간으로 권상연과는 내외종의 사촌 사이다.

혈연 중심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던 것이다. 전동성당은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터에 있다. 성당 앞에 두 순교자를 새긴 동상도 서있다. 먼저 배운 이가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도 줬다. 이승훈은 신자가 사제역을 하는 ‘가성직제’가 교회법에 어긋남을 뒤늦게 알게 된다. 베이징에 문의 결과, 1790년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가성직제와 제사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을 먼저 실천한 이가 윤지충이었다. 윤지충은 1790년 모친상 때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권상연도 따라했다. 소문이 퍼져, 체포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한다. 두 사람은 형장터로 끌려가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연신 외쳤다고 전한다. 유족은 처형 9일만에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매장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국방부 유해감시단까지 나서, 과학의 개가로 유해를 감식한 결과 순교자로 확인해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중 윤지충 등 순교자 124명 시복식을 거행했다. 이때, 대표로 호명된 이가 ‘윤지충’ 순교자다. 당시 복자로 선포된 이들은 양반이 다수다. 하지만 중인과 천민들도 포함돼 있었다. 1790~1800년 사이에 천주교가 다양한 사회계층으로 확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 순교자 중 유해가 확인된 사람은 성인 103위 중 27명, 복자 124위 중 19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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