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박대성 화백···매의 눈으로 본 삼라만상, 묵으로 일필휘지

붓 꺾이고 먹 사라져가는 세태 개탄하며 정진 또 매진

소산 박대성 화백

소산(小山). 한국화의 거장으로 고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그의 작품을 좋아해 집무실에 걸어뒀다. 그래서 30년 전, 삼성그룹의 전속화가로 발탁됐다. 먼저 그에게 손을 내민 쪽은 정주영의 현대가였다. 아티스트는 결국 예술에 일가견 있고, 대 컬렉터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로 갔다.

1945년 경북 청도 운문면 공암리에서 한의원을 하던 아버지의 7남매 중 막내로 났다. 청도 금천중을 마쳤다.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그가 5살 되던 1949년 여름, 운명을 가를 일대 사건이 났다. 험한 운문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밤중에 하산해 부모를 ‘반동 지주’라며 처형했다. 그때 반동으로 몰린 마을 주민 10여명도 살해됐다.

아버지 등에 업혀 울던 그도 한쪽 팔을 잃고 말았다. 남은 오른 팔로 그림만 그렸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이름 날렸다. 국전에서 내리 8번 입선했고 가나아트의 전속화가가 됐다. 타고난 천품에 피나는 노력까지 한 덕분이다.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까지 받았다.

소산 박대성 화백의 ‘불국설경’

특히 불국사를 그린 ‘불국설경’이 유명했다. 지금 소산은 그 풍광을 리바이벌 하고 있다. 너덧 그루의 거송들을 앞세운 대작을 작업실 벽에 세우고 붓놀림에 여념이 없다. 조명을 끈 채 은은한 불국사 설경을 감상했다. 미완성이지만 하얗게 변한 불국사가 보인다.

누군가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만지려 하자 소산은 “눈 내리는 날은 룩스(조도)가 딱 이 정도”라며 만류했다. 거장의 섬세함이 느껴졌다.

박대성 화백은 젊은 시절부터 삼성가의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자주 열었다. 삼성의 선대들 이병철, 이건희 회장이 그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다. 경주 엑스포 공원 내 솔거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기증했다. 지금 방송통신심위원장 유희림이 경주엑스포 사무총장·대표로 있을 때 공을 들였다. 그도 유학자 집안에서 잔뼈가 굵은 유희림 위원장을 상당히 아끼는 눈치다.

2021년 3월 솔거미술관에서 전시한 대작(1억원 상당)을 아이가 올라타서 훼손했다. 박 화백은 그냥 두라고 했다. 당시 “살펴보니 아이 눈에는 미끄럼틀처럼 보이기도 하겠다. 어린 아이가 미술관에서 나쁜 기억을 가지고 가면 안된다, 사람끼리 굳이 원수지고 살 필요가 없다.” 이 말이 압권이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 작품을 210만명 넘게 봤을까? 그 아이는 봉황이다. 봉황이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 정도는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목은 이색 초상 <소산 박대성 화백 작>

깡마른 작은 산의 대인 풍모다. 그의 너그러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 9월 중순 어느날 그의 제자 10여명과 경주의 맛집 경주곰탕에서 조우했다. 경주곰탕은 최고의 맛으로 박 화백 단골식당이다. 감포산 미역국을 내놓는 식당도 즐겨 찾는다. 그와 경주에서 대구를 찍고 지리산 거쳐 고창까지 우중 드라이브를 했다. 아우 향산 한영용과 최형우 장관 장녀 최은지씨가 운전했다.

1시간쯤 장대비를 뚫고 달리느라 최은지가 고생했다. 소산과 나는 우리 것의 우수함에 관해 담소했다. 지리산을 관통해 지나자, 운전대는 향산에게. 거짓말처럼 맑게 갰다. 산에 가느다란 실안개가 피어오른다.

지리산 자락 와운 <사진 최영훈>

나의 와운臥雲이라는 당호가 굵고 뚜렷하게 산위에 현현됐다. 눈을 돌릴 수 없었다. “텐산산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광”이라고 향산이 소릴 지른다. 이백의 태향이 바로 키르기스스탄이다. 나는 그 나라의 맑고 싱그러움을 애정한다.

거짓처럼 비가 개이기 전 심청가를 향산이 틀었다. 정권진(1927-1986)의 소리였나? 전남 보성군 회천면에서 났다. 20세기 최고 판소리 명창 중 한명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정재근의 종손이자, 응민의 아들이다.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전수교육조교 정회천·대금 정회완·판소리 명창 정회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보성소리 정통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흥얼거리면서 컸다. 아버지 정응민은 ‘대우도 못 받고 힘만 드는’ 소리를 배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울 수 없었던 정권진은 아버지의 수제자 박기채를 찾아가 판소리를 배운다.

강진의 고성사라는 절에 들어가 5년 정도 독공을 했다. 아버지의 첫 제자격 김준섭에게도 토막소리를 익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응민은 고향인 보성으로 아들을 불렀다. 애비가 자식을 직접 가르칠 수는 없다. 제자 박춘성을 앉혀놓고, 그를 가르치며 동시에 소리를 전수했다. 명창 김소희를 비롯해 판소리 거장들이 그의 문하생들이다.

56세부터 전남대 교수로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로 됐다. 그의 심청가는 박유전-정재근-정응민으로 이어진다. 본래 타고난 성음이 탁하고, 성량이 다소 부족하며, 상청도 약했다. 그러나 구성진 음을 내는 창법으로, 청중의 애간장을 녹였다. 강산제 보성소리 계승자로, 보성소리의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서양음악만 가르치는 현실을 소산은 크게 개탄했다. “8음계는 복잡하고, 가지 수가 많아지면 힘이 약해져. 모으고 응축해야 폭발적인 파워를 낼 수 있습니다.”

필묵의 대가답게 색으로도 넘어온다. “색도 우리 5방색의 기운이 더 강렬합니다.” 국악의 기본 오음계는 궁상각치우로 이루어진다. 현대음계로 다(C)음계, 도레미솔라에 해당된다. 오음계는 오행의 속성과 관련돼 있다. 임금이 다스림에 있어 지켜야 할 도리다. 한서의 율력지와 예기의 악기 편에 나온다.

궁성은 토에 속하며 중앙이니 임금을 상징한다. 상성은 토가 다스리는 금에 속하니 신하의 법도로 그 역량이 빛난다. 각성은 목에 속하니 오히려 임금이 존중해야할 백성의 도리다. 치성은 화이니 바삐하는 일로 번성하여 복을 받는다, 우성은 물로서 세상 만물자체를 일컫는다. 궁상각치우는 음계의 개념 외 악기 자체의 소리를 상징한단다.

거문고 가야금 아쟁 해금은 궁성, 장구 좌고 태평소 등은 상성, 편경 특경은 각성, 대금 중금 단소 피리 생황은 치성, 편종 징 꽹과리 나발는 우성을 낸다는 거다. 한국의 소리를 나도 잘 안다고는 못 한다. 때로 신명을 돋우는 소리를 즐길 뿐이다. 오방색의 은은한 강렬함도 좋아한다.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5가지.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오행을 생성한다. 주역의 음양오행이 기본이다.

오행에는 오색이 따르고 방위가 따른다. 중앙과 사방을 기본으로 삼아 황(黃)은 중앙, 청(靑)은 동, 백(白)은 서, 적(赤)은 남, 흑(黑)은 북을 뜻한다. 황은 오행 가운데 토에 해당한다. 우주의 중심이라 가장 고귀해 임금의 옷을 만든다. 청은 오행 가운데 목에 해당하며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이다.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색으로 쓰였다. 백은 오행 가운데 금에 해당하며 결백과 진실, 삶, 순결 등을 뜻한다.

백의민족인 위는 예로부터 흰 옷을 즐겨입었다. 적은 오행 가운데 화에 해당하며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을 뜻한다. 삿된 것, 부정타는 걸 쫓는 벽사의 빛깔로 쓰였다. 흑은 오행 가운데 수에 해당하며 인간의 지혜를 관장한다. BTS가 나온 바탕에는 우리가 가르치지 않고 있지만, DNA에 깊이 각인된 우리 소리ㆍ우리 색들이 있을 테다.

음계는 동양의 여러 나라와 스코틀랜드의 민요, 남미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음악에서도 많이 쓰곤 한다. 중국 전설에서는 영륜(伶倫)이라는 음악가가 황제의 명령으로 산에 가서 대나무 피리를 만들었다. 봉황이 알려 주는 대로 음을 기록했다. 이때 쓴 다섯 개의 음표가 여전히 중국의 오음계로 쓰이고 있단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음악을 수학과 천문학, 신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음악(Music)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의 아홉 여신 중 뮤즈(Muse)라는 예술의 신 이름에서 따온 거다. 어제 미친 억수비를 창밖으로 보며 구성지고 애틋한 심청가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다시 소산 박대성 화백으로 돌아가자. 그는 대성은 했으니 겸양지심으로 그리했다. 작년 그는 미국 하버드대 미술관 등을 도는 해외전시회도 했다. “하루에 그림을 몇시간?” 우문을 누군가 했다. 즉문에 바로 나온 즉답은 “25시간” 행주좌와 늘 참선을 하듯, 잘 때 꿈에서도 그린다는 말이다. 유수의 미국 대학에서 그를 탐구하고 책도 낸 이유일 거다. 그는 노벨문학상 따위에 연연하지 말란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뛰어난 한글, K-한류를 더 확산시키면 된다. 한글 아는 사람을 영어나 스페인 아는 사람만큼 늘리면 만사 OK!

“우리 말의 감칠나는 맛을 어는 나라 언어로 재현할 수 있을까?” 소산의 정곡을 찌른 말에 답이 있다. 그는 엊그제 포항 포스텍에서 강의했다. 그때 말했다. “노벨상보다 더 돈도 많이 주는 박태준상을 권위있게 만들어 상을 주시라”고 말이다.

그의 말이 아직도 귀에 여운이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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