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26년간 최형우 장관 수발 원영일 여사의 ‘아름다운 동행’

원영일 여사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원영일 여사는 개인전을 여러 차례한 화가다.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남편 내조에 집중하기 위해 국전 수상자로 유망하던 화가는 붓을 꺾고 만다.
26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져 누운 온산 최형우 전 내무장관이 원영일의 남편이다. 올해로 두 사람은 결혼 57주년을 맞았다. 3년 뒤 2026년, 혼인 60주년을 맞게 된다.

그 온산 부부는 올해 겹경사를 맞았다. 온산이 4.19민주화유공자로 선정된 데 이어, 원 여사도 장한어머니상을 받았다.
9월 초 장한어머니상 시상식 날 유준상 헌정회 부회장이 원 여사에게 장한어머니상 수상 감회를 청했다. 원 여사는 “우리 영감이 평생을 그렇게 한 길로 가면서…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 왜 다른 사람은 정치를 해도 다 쉽게 하는데 유독 당신은 이렇게 어렵게 하느냐?”며 “온 가족을 다 팽개치고 뭐냐?”고 온산에게 항의도 했다고 말했다.

온산의 답이 참 기가 막히다. “그랬더니 나보고 ‘당신은 참 나쁜 사람’이래요.” 온산은 “4.19세대이고 천주교 신자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쳤느냐?”고 거꾸로 나무랐다. 마음에 없는 말도 때로 했다.

“그렇게 힘들면, 지금이라도 보따리 싸서 가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왜 바닷물이 안 썩는 줄 알아? 0.3%의 소금이 있어서 안 썩는다’는 거예요.”

4.19 때 동국대 정외과를 다닌 온산은 앞서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로 정학을 맞았다. 4.19때 그는 경무대(청와대)로 제일 먼저 달려갔다. 가는 도중 경찰이 쏜 총알에 친구도 죽고, 후배도 쓰러졌다. 그때 피흘리며 쓰러진 친구가 말했다. “친구가 ‘형우야! 너만 믿고 간다’. 막 이렇게 소리를 쳤다는 거예요. 그게 남편에게 트라우마로 귀에 늘 쟁쟁한 거예요.”

온산은 결혼 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창문을 확 열곤 했다. “이 사람이 돌았나? 와 이러노 싶더라고요. 그래서 보니까 가슴이 답답해가지고 그래서 문을 자꾸 열고 그래요.”

그런 남편을 보고 원 여사는 “아무리 고생이 돼도 참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장한어머니상 시상식 장에서 4.19 영상을 보면서 나도 가슴이 찡하더라고요. 초등학생들도 5명이나 숨졌다니…”

4.19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가 그래도 요 모양이라도 됐다 싶다고 했다.

“내가 결혼한 뒤 조병옥 박사 댁에 인사를 갔어요. 사모님이 나보고 ‘참 당신들은 그래도 우리 세대에 비하면 행복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나라가 없을 때 나라를 찾기 위해서 정말로 피눈물 흘리면서 했다. 너희는 나라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그때부터 정말 사명감을 갖고 해나갔습니다.”

원 여사는 남편이 정말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쪽으로 돈이 들어오면, 한 30분 있으면 저쪽으로 다 나가버리고 없어요. 평생을 그렇게 살았거든요.”

4.19 유공자를 다른 사람 다 하는데, 왜 안 하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학생 때 울분에 차가지고 정의 감에 불타 그랬는데, 무슨 유공자 돼가지고 돈 몇푼 받아 먹고 그러느냐? 나 그런 거 안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온산이 쓰러져 누우신지 26년 세월이 흘렀다. 작년에 넘어져 다친 뒤 지금은 자리보전 신세다.

“한 3년 전에 그러시더라고요.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다. 어디로 갈까’ 좀 고민을 하시더니, 딱 그러시더라고요. ‘4.19 묘지로 가고 싶다. 지금 빨리 신청을 해서 해보라’는 거예요.”

문재인 정부 때도 신청해봤으나 탈락했다. 4.19에 참가한 증빙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발품을 팔고 갖은 노력 끝에 자료를 찾아내 이번에는 4.19유공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울산시 관계자들이 9월 19일 원영일 여사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자택을 찾았다. <사진 최영훈>

9월 19일 울산시 행정·정치·지방의회·경제계의 장 4명이 위례에 있는 온산 자택을 방문했다. 온산은 울산의 광역시 승격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상일보에서 2023년 7월13일자로 관련 보도를 했다.

그런 뒤 지역 정치·행정·경제계에서 ‘어려움에 처한 온산을 돕자’는 여론이 확산됐다. 온산은 광역시 승격 국회 법안처리 4개월 뒤, 1997년 3월11일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7월15일 광역시 승격조차 직접 보지 못했다.

원 여사는 “남편이 이번에 4.19 유공자가 이번에 되고 나니까, 갈 곳을 딱 정해놓고 나니까 본인도 마음이 편하고 저도 마음이 편해요.”

원영일 여사는 뜻밖에 ‘장한어머니 상’과 관련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장한 어머니 상’을 왜 받느냐?” 그랬더니, “장관님을 26년 간 그 정도로 보필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여자들 중에 별로 없을 거다.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상이니까 아무 말씀하시지 말고 오시라”라고 주최측이 말하더라고 했다.

원 여사는 올해 84살이다. 비상한 기억력에 아직도 단아하고, 말도 조리가 있다. 몇년 전, 낙상으로 고관절을 다친 후 걸음이 불편하다.

걸음 문제만 해결되면, 백수 넘겨 건강하게 사실 거다. 원 여사가 좋아하는 그림도 조금씩 다시 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니 허무한 마음과 남편 병간호뿐이더라고요.”

부군의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에 오랜 병구완까지…자식 챙기랴, 가계까지 책임지랴 동분서주했다. 한때 3평 남짓 조그만 식당을 내 음식을 팔기도 했다. 그러니 캔버스를 수놓던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국전 입선까지 했건만, 원 여사는 결혼 후 붓을 손에서 놓다시피했다. 그러다 붓을 다시 잡은 건 10여 년 전으로 일흔이 가까워져서였다.

“97년 3월,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이후 간호자로 신분이 바뀌어 다른 일은 모두 접어야 했어요.”

그후 남편의 격려로 일주일에 두 차례 인천에 마련한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소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7년 전, 남편의 병구완을 하면서 틈틈이 그린 작품들로 원 여사는 개인전도 했다. 라메르에서 열린 전시회 ‘세월의 흔적’은 결혼 50주년 금혼식이 계기였다고 한다. 2009년부터 그린 나팔꽃·장독대·단풍 등 그림 30여 점과 온산이 1996년에 쓴 글씨 다섯 점이 함께 걸렸다.

상도동계의 대표 정치인인 온산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가신이 아니라 파트너였다. 야당의 투사로 아스팔트를 뛰어다니며 최루탄에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자택 거실에 놓여있는 민주산악회가 보낸 꽃바구니. <사진 최영훈>

울산과 부산 등에서 6선 의원으로 정치 인생을 정리한 바 있다. 80년 신군부에 맞서다 의원직을 잃고,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지금도 전두환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치가 떨립니다.” 하도 가택수색을 자주 당해, “그림이나 글씨라도 가져가고 더 없더라”고 상부에 보고해달라고 하소연까지 했단다.

온산은 통일민주당 부총재, 민자당 사무총장, 정무1 장관 그리고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불곰 김동영 전 장관 타계 후, YS 집권에 기여한 상도동계 명실상부 2인자였다.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2008년 10월 2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부친 고 김홍조옹 빈소가 마련된 경남 마산 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YS와 반갑게 만나고 있다. YS는 최 전 장관을 만나자 마자 “몸도 불편한데 뭐할라꼬 왔노”라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부산일보 DB>

2015년 11월, YS가 별세하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빈소를 찾아 대성통곡했다.

온산 최형우 장관은 울산 부근 서생의 빈농, 한학자 집안 출생. 5공 때 7년간 정치를 못하게 발이 묶였다. 그때 온산은 서예를 갈고 닦았다. 소학·사서삼경을 어릴 때 귀동냥한 후 처음으로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운 거다. 나중에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 만큼 실력이 높아졌다.

원 여사는 “장관님이 ‘미술과 서예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였지만 지금은 못 하니 당신이라도 열심히 하라’고 응원했다”며 지금도 고마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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