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탄생 주역 최형우 전 장관, 60년만에 4.19유공자 포상
YS 문민정부 탄생 주역 민주화운동 헌신
내무장관 때 소방공무원 국립묘지 안장-119구급대 등 업적
22일 온산 최형우 전 내무장관의 위례동 집이 모처럼 붐볐다. 4.19혁명 63주년을 맞아 당시 고교생 17명과 고 김주열 열사 모친을 비롯한 20여명이 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거기에 최형우 전 내무장관도 포함돼, 보훈부 서울동부지청장이 4.19유공자 포상 차 이날 오후 자택을 방문했다.
필자는 30년 가까이 남편 병구완을 하는 부인 원영일 여사에 이끌려 거동이 불편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침상에 누운 채 미소짓던 온산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김영삼 대통령 경남고 후배…”라 하자 온산의 눈이 빛난다. 누운 살갑게 내 손에 입맞춤을 하며 따스한 정을 표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내 아내에게도 똑같이 살갑게 맞이한다.
온산 최형우는 동국대 정외과 재학 중 1960년 4.19 때 총탄이 쏟아지는 경무대 앞으로 달려가 시위를 벌였다. 온산은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으나, 후배가 흉탄에 스러져 숨을 거두는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 당시 3.15부정선거 규탄과 4.19 직전 교내 시위 주도로 온산은 제적 복학을 되풀이해야 했다.
60여년 만에, 그후 민주화운동 경력 30여년 만에 유공자 포상을 받았으니 감개가 무량했을 거다. 온산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바 있다. 노태우 정부 때 정무장관을, 문민정부 출범 후 내무장관을 했다. 울산-부산 연제구 등에서 6선을 거친 관록의 선 굵은 정치인이다.
YS를 대통령 만든 게 바로 ‘좌동영 우형우’ 콤비다. 1991년 YS의 맹장 중 한명인 불곰 김동영이 암으로 타계했다. 그후 온산은 상도동계 명실상부한 2인자로 YS의 대권을 위해 헌신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직후 집권당 사무총장에 올라 당 개혁에 매진했다. 비대한 민자당 수술에 팔을 걷어붙이던 중 온산은 불의의 일격을 맞는다. 한 신문이 둘째 아들의 대학입시 문제를 거론했다. 경찰 조사결과 사실 무근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개혁을 진두지휘해야 할 중책을 맡았던 온산의 충격은 컸다. “우째 이런 일이…” YS 역시 핵심측근의 비운을 안타까와 했다.
문민정부 초, 개혁조치로 민정계 원로들이 사퇴 또는 탈당하거나 제명당했다. 당료 중 상당수를 정리하는 개혁에 박차를 가하던 중이었다. 결국 온산 역시 사퇴의 결단을 내린다. 선배 장경환과 함께 그의 향리인 강원도 고성으로 가 칩거한다. 거기서 거친 바다 소리만 들었다. 권력도, 인생도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설악산에서 도 닦는 고승들을 만나 삶의 지혜를 듣기도 했다. 신흥사 조오현 스님은 머리를 깎고 불제자가 되라고 당부했다. 칩거 두 달이 채 되기 전 YS는 너덧 차례 전화를 걸었다. 6월항쟁 기념식 전에 반드시 서울로 돌아오라고 강권했다.
그후 세계화 시대 안목을 넓히기 위해 중국 등 해외를 다녔다. 사무총장을 그만둔 지 8개월 만인 1993년 12월 20일. 행안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막강했던 내무장관 중책을 맡았다. 광역단체인 시도지사 및 시장 군수 임명권까지 지녔다.
YS도 “아무개는 신경 써주게”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정도였다. 온산은 “인사 공정을 당부하지 않으셨느냐”고 차갑게 답했다. 최형우는 장관 때 경영행정과 현장행정, 확인행정의 세 목표를 세웠다.
일본 지자체에 밝거나 기업경영에 밝은 사람을 시도지사에 임명했다. 케케묵은 관료주의의 낡은 기풍을 쇄신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온산은 파출소 소방서 동사무소를 몸소 방문해 현장을 챙겼다. 내무부에 ‘구조 구급과’를 신설할 정도로 현장행정을 강조했다.
소방서가 불만 끄는 게 아니라, 구조구급대 119의 탄생은 오롯이 온산 덕이다.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대원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도록 법도 고쳤다. “목숨 걸고 불 끄게 하려면 필요하다”고 소신껏 여야 정치권을 설득했다. 온산은 일제 때 만들어진 낡은 행정구역 개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직할시를 광역시로 승격시키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울산을 광역시로 만들고, 경기도의 분도도 과감하게 시도했다. 경기도 분도는 지역이기주의의 반발로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온산은 실세 장관답게 재임 1년 간 많은 개혁의 발자취를 남겼다. 온산은 대한민국의 정보화사회 진입을 위해서도 힘을 쏟았다.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 교수와 만나 대담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정보화 물결은 나라 전역을 휩쓸었다.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와도 만나 전자민주주의 시대를 논했다.
온산은 정보화를 다른 차원의 민주화운동이요 애국이라고 여겼다. 정보화 마인드를 확산시키고 정보화사회를 앞당기기 위한 범국민적 운동이 절실하다며 민-관-정을 독려했다.
이런 온산의 발자취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 큰 꿈을 꿔보려다 스러진 탓이다. 온산은 성질이 급해 ‘불칼’과 같았다. 3당 합당 때, YS ‘오른팔’이면서도 “군부 독재정권과 손잡을 수는 없다”면서 어깃장을 놨다. 이때 주요 중진의원들이 참여했던 민주당측과는 달리, DJ 평민당은 통합에 미온적이었다.
평민당 통합 찬성파는 정대철·조세형·김덕규·이상수 등 10여명으로 목소리를 제대로 못 냈다. 4당 구도에서 제1야당 지위를 누리던 DJ가 반대한 때문이다. 평민당의 묵묵부답으로 온산의 야권통합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역사는 ‘3당 합당’으로,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간다”던 YS 뜻대로 갔다.
YS 아내 손명순 여사와 친했던 최형우 부인 원영일 여사 회고담.
“손 여사가 씩씩거리며 나오던 온산을 보고, ‘얘기가 잘 안 됐나요?’라고 했다. 그러자 ‘저를 보고 돌대가리라고…’ 그때 손 여사가 재치있게 ‘큰 돌과 작은 돌이 잘 해보지 그러셨어요(웃음)’. 온산도 웃고 만다.”
YS가 서거한 2015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서 온산은 오열했다. 몸이 불편한 백발 노정객은 YS 영정 앞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말까지 웅얼거리면서 꺼이꺼이 통곡해 주위를 처연하게 만들었다. YS와 평생 고락을 함께 한 온산으로선 남모를 회한이 치솟았을 거다.
YS에게 충성한 ‘좌동영’은 24년 전인 1991년, YS 대권 고지 목전에 타계했다. YS마저 저 세상으로 갔으니, 홀로 남은 우형우 마음이 찢어졌을 거다.
좌동영은 1991년 여름 숨기기 전 말기암에도 5공청산과 3당통합 작업을 마무리했다. 원내총무와 정무장관을 맡아 YS의 여권 내 위상 강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말기암인데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만나 폭탄주도 마다않았다”(상도동계 중진)
김동영은 YS에게 본인의 암 투병 사실을 끝까지 숨긴 ‘전설의 충심’이었다. 그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온산은 영결식에서 이름을 외치면서 “나를 두고 먼저 가면 어떡하냐”고 피눈물을 뿌렸다. 한 시대를 풍미한 상도동계는 지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회창의 첫 대권 도전 때인 1997년, 측근들의 YS와의 차별화가 불씨였다.
온산이 4.19 유공자로 포상받은 22일, 김무성을 비롯한 상도동계는 김영삼민주센터에서 월례 세미나를 했다. 참으로 무상한 게 권력이다. 그런데도 부나방처럼 권력을 좇고, 집착을 못 버린다. 4.19묘지에 영면할 곳을 구한 온산 최형우는 한쪽 손만 자유롭게 움직일 뿐이다. 몸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이나마 편안하시기를 빈다. 30년 가깝게, 간병에 지쳤을 부인 원 여사 건강을 무엇보다 빈다.
YS 대통령의 우형우 좌동영 같은 선 굵은 정치인들은 종적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