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주역 최형우의 ‘4.19묘지 안장’ 꿈 이뤄지길…

70년대 초반 야당의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최형우 전 장관과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김영삼민주센터>


4반세기 전, 쓰러졌어도 약한 모습 안 보인 온산

젊은 피 때 참여한 4.19를 기리며 영면할 곳으로  

김영삼(YS)에겐 좌동영(김동영) 우형우(최형우)가 있었다. 둘은 민주산악회를 만들고, YS를 대권 고지에 올리려고 애썼다. 5공 정권의 폭압으로 주군 YS는 가택 연금 중이었다. 그래서 이민우를 앞세워 둘이 민주산악회를 만들었다.

둘은 후농 김상현과 작당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도 만든다. 김대중(DJ)는 후농에게 YS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엄명했다.

후농이 없었다면, 민추협은 탄생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아무튼 민추협은 85년 2.12 총선 때 돌풍을 일으킨다. 여파로 5공 정권의 철권통치는 유화책으로 돌아선다.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총선에서 우동영은 그때 김태호·심완구가 출마한 울주군에서 고배를 마셨다. 울주군 온산면이 우형우로 불린 최형우의 향리다.

그는 YS 대권을 위해 무지하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불곰 김동영은 YS가 정권을 쥐기 1년 전 하늘로 갔다. 최형우는 1993년 2월 YS 정권 출범 직후 민자당 사무총장에 오른다. 그러나 아들의 경원전문대 부정입학으로 사퇴를 한다.

같은 해 말 내무부 장관에 올라 1년여 정권의 2인자로 지냈다. 1996년 부산 연제구에 출마해 당선해 5선이 된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대권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YS의 의중을 알아채고 대권 행보를 접는다.

당권을 맡아 여권 후보 지원하는 쪽으로 선회를 한다. 당시 민주계의 적장자였고, 당내 온산계도 확고했다. 그가 미는 후보는 누구든 대세론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YS도 그 역할을 감당할 최형우를 당 대표로 점찍었다.

그해 3월 11일 서울 P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 사건은 최형우 개인 차원을 넘는다. 참으로 현대 정치사의 한 분수령이다. 그가 스러진 뒤 최형우가 갈 당 대표는 이회창(창)이 된다. 여세를 몰아 창은 민정계와 김무성 등 일부 민주계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9룡 간 쟁투의 김을 빼고 대선 후보가 된다.

아들 병역 비리를 부풀린 야당 공세에 창은 무기력했다. 그래서 DJ가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정치사를 새로 썼다. 그 최형우가, 대권 도전까지 꿈꿨던 정치인 온산이 ‘하늘의 별’로 오를 날을 채비하는 모양이다. 한달 전, 천재 시리즈 작가로 호가 난 조성관과의 연으로 친하게 지내는 덕분에 당대의 건축가를 만났다. 그 분이 온산의 슬하와 연이 있어 내게 근황을 전했다.

온산은 정계 은퇴 후 거동이나 소통이 불편한 상태다. 그렇게 4반세기의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명리를 그리 탐하지 않으며 살아온 온산의 염원이 있다.

최형우는 부산공고와 동국대 법정대를 마치고 정계 투신했다. 그리고 YS 아래에서 할 말을 하며 평생 2인자로 살았다. 온산은 자리를 탐하지도 않았고, 담담하게 살아왔다. 쓰러진 후에는 더더욱 그런 인생관을 지켜왔다.

그런데 최근 그에게 집착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그는 공고를 졸업한 뒤 늦깎이로 동국대를 다녔다. 재학 중 4.19를 맞아 그는 총탄을 무릅쓰고 목숨을 건 시위를 했다. 그런 연고로 생을 하직하기 전, 영면할 곳을 선택했다.

수유리 4.19 묘역에서 안식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4.19 묘역 안장 신청을 하니, 메이저 신문 등에 최형우가 당시 시위에 나선 기사를 요구한다고 한다. 그 부탁을 나이든 저명 건축가가 나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친정인 동아일보의 정치부장과 부국장에게 부탁하는 카톡을 보냈다. 답이 오길 기다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누구든 ‘최형우가 동국대생으로 4.19 시위에 참가한 기사’나 다른 증빙자료를 아시면 알려주시길 앙망한다. 온산은 70세를 맞아 고희연에서 잠시 언론에 등장했다. 그때도 더듬더듬 의사소통을 겨우 할 수 있는 정도였다. 2015년 YS가 숨졌을 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조문했다. 평생을 함께 한 동지였기에 크게 오열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통곡하고, 영정 앞에서 몸을 채 가누지 못했다. 조문 기간, 불편한 몸으로도 하루도 빠짐없이 빈소에 찾아와 통곡했다.

2008년 10월 2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부친 고 김홍조옹 빈소가 마련된 경남 마산 삼성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을 YS가 반갑게 맞고 있다. YS는 최 전 장관을 만나자 마자 “몸도 불편한데 뭐할라꼬 왔노”라고 말했다고 부산일보는 전했다. <사진 부산일보 DB>

최형우나, 집권 직전 숨을 거둔 김동영까지 YS를 마음으로 모셨다. YS는 ‘정치는 세’, DJ는 ‘정치는 생물’, JP는 ‘정치는 허업’이라고 했다. YS는 그 말대로 평생 인재를 모으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중국 전국시대 맹상군처럼 인재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특유의 친화력과 매력으로 강호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최형우·김동영·김덕룡·서석재·서청원·김무성·손학규·이인제·노무현·김광일·이회창·이재오·김문수·홍준표·안상수·황병태·박세일 등···.

많은 인물을 발탁해 큰 정치인으로 키워낸 게 YS다. 그런 YS가 인정한, 바른 말 곧잘 한 2인자가 온산이다. 다시 한번 동국대생 최형우의 52년 전, 4.19 시위 참가 신문 기사든 증빙자료를 아시는 분은 필자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란다.

최형우 장관 약전

1993년 YS 정권 출범 후 집권당 사무총장에 임명된다. 아들의 전문대부정입학 건이 문제가 되자 쿨하게 바로 사퇴했다. 광역시장 도지사 시장 군수 임명권과 경찰 지휘권까지 지닌 막강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96년 총선에서 연제구에 출마해 당선돼 5선 고지에 오른다. 그러나 YS의 뜻에 따라 대권 행보를 접고 당권을 맡기로 한다. 쓰러질 때, 통보받고 충격을 받았다는 설이 있지만 아닌 것 같다. 1990년 3당 통합 후 노태우 정권 때 김동영에 이어 정무장관이 된다. 상도동 가신의 대표주자 중 한명으로 ‘좌동영 우형우’였다.

동국대 동창인 불곰 김동영도 소신과 행동으로 말하는 정치인이다. 나이가 한살 위인 최형우는 불곰보다 완력이 더 셌다. 불곰 좌동영은 1991년 8월 19일, 암으로 별세했다.

당시 YS는 “문디 자슥아, 저 시상에 무신 맛난 떡 있다꼬, 이리 빨리 가노!” 통곡했다. 국회장으로 열린 영결식 때도 YS는 추도사를 읽던 중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다.

온산은 1971년 총선 때 울산-울주군에 출마, 첫 배지를 단다. 이듬해 10월유신 후 김녹영, 김한수, 김상현, 나석호, 김경인, 조윤형, 조연하, 이종남,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등이 군부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80년에도 김동영 등과 함께 모진 고문을 당하고 정치규제도 당했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마자 민추협에 가입해 주도했다. 이듬해 2.12총선 때 민정당 김태호-민한당 심완구에게 낙선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 CIA 지부장 존 스타인을 질책한 강골이었다. 그때 스타인에게 광화문 앞에서 분신자살 하겠다고 마구 윽박질렀다. 스타인이 그를 말릴 정도로 민주주의를 열망한 의기의 사나이였다.

1990년 3당합당으로 민자당이 출범할 때는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YS와 가족의 간곡한 부탁으로 철회, 합당에 참여하게 된다. 1992년 대선 때 민주산악회 회장으로 YS 당선을 위해 진력을 했다.

1997년 3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그의 정치 역정은 끝났다. ‘3김 청산’을 주창, ‘신정치주류론’과 ‘3두마차론’을 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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