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민주화에 헌신 최형우, 수유리 4.19묘지 안식할 자격 ‘충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청마 유치환이 짝사랑한 시조시인 이영도의 ‘진달래’다. 4.19 때 피 흘리며 스러져간, 채 피어나지도 못한 젊은 넋들을 기렸다. 44년 전, 필자는 대학생이 됐다. 당연히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반지하 운동권 써클인 학회를 다녔다. 그때, 운동권에서 애창한 여러 노래들도 배웠고, 지금도 흥얼거린다. 하지만 이 노래, 진달래의 시적인 감수성에는 유독 감탄했다.
매년 4.19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 산하엔 어김없이 꽃이 핀다. 새가 울면 같이 울고, 새가 날면 같이 웃던 젊은 넋들처럼… 연분홍 꽃이 이 산 저 산,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활짝 핀다. 온 산하를 수줍게 물들인 그 진달래 꽃망울이 활짝 열린다.
며칠 전, 온산 최형우가 안식할 터를 찾고 있다는 글을 썼다. 동국대생 온산은 4.19 때 앞장서 동지들과 함께 광화문에 달려갔다. 그 무렵, 서울대도 관악이 아니라 동숭동에 있었다. 바로 지척에 혈기방장한 온산이 다니던 동국대가 있었다.
서울대생들보다 먼저 광화문에 나간 게 동국대생들이다. 문화재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도 동국대를 졸업했다. 그래서 온산을 학창 시절에 아시는지 물어봤다. “잘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알아보니, 온산은 35년생이었다. 김종규는 39년생, 정상적 진학이면 서로 못봤을 나이다.
지난 번 내 글을 읽고 나의 고교, 대학 5년 선배인 울산 출신 안종택 선배한테서 답이 왔다.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의 길을 걸었다. 온산의 발자취를 담은 동국대 발간 4.19 책과 경향신문의 4.19 특집(1995년 4월 19일자)기사를 보냈다.
바로 류춘수 이공건축설계사무소 회장에게 포워딩을 했다. 그는 천재작가 조성관의 ‘지니어스 테이블(Genius table)’ 강좌에 초청받았을 때 만났다. 건축계 거장인 류 회장은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비롯해 다수의 걸작을 남긴 바 있다.
그가 온산의 맏딸인 은지씨와 인연이 있었다. 오래 전, 갤러리 관장인 은지씨를 위해 인테리어를 해줬던 거다. 류춘수 회장은 “온산은 돈이나 자리나 별로 집착하지 않고 산 사람인데 저 세상 갈 날이 가까와져선지 4.19묘지 영면을 고집스럽게 원한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묘지 측에서) 주요신문에 동국대생 온산의 4.19참여 기사를 원하니 도움을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먼저 친정 후배들에게 이를 알리고 “화제기사도 될 듯하다”고 해봤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류 회장이 채근을 할 때까지도 아무 답도 없다. 알고 보니, 온산의 맏딸 은지씨도 1년 전부터 수소문을 해봤지만 찾지 못해, 그러던 중 자포자기 상태에서 류 회장에게 운을 떼, 내게도 전해진 거였다.
어제 최형우 장관 딸 은지씨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고맙다”는 과분한 말이다. 그래서 “저가 아니라 안종택 형이 수훈갑”이라 했다. 은지씨가 안종택 형에게도 감사 전화를 했다고 알린다.
온산 같이 애국한 분, 민주화에 기여한 분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온산이 돈이나 자리를 탐했다는 말을 나는 일찌기 들어본 일이 없다. 굳이 집착한 건, YS의 집권과 나라 사랑, 그 둘에만 골몰했을 거다. 요즘 흔한 정치를 하며 잇속이나 챙기려는 생계형 정치꾼이 아니다.
독재와 당당히 맞서 고문을 당해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낸 지사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