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울산 ‘광역시 승격’ 27주년…수훈갑 최형우장관 27년째 투병
오늘은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한지 27년이 되는 날이다. 1960년대 초 인구 8만명의 소도시에서 출발한 울산시는 1990년대에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뒷받침한 행정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여러 부작용들이 생겨났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자율성이 제한된 기초단체의 시스템으로 운영되니 행정력 부재라는 부작용만 커졌다.
그로 인해 울산 발전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국가 발전에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 주도 공업화에 따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외면적 성장은 이룩했다. 그럼에도 정작 주민들의 삶의 질은 조건이 비슷한 다른 도시에 비하여 현저히 낮았다. 특히 도시 인프라나 교육, 문화, 의료, 스포츠 시설은 전무하거나 구색만 갖춘 정도였다.
시민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광역시로 승격해야 한다는 인식이 1990년대 초부터 시민 사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울산시와 시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대정부 건의부터 시작해 1996년 12월 26일 마침내 광역시 승격 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마침내 27년 전인 1997년 7월 15일 승격, 광역시의 꿈을 이뤘다. 울산은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가지산, 신불산 등 해발 1000m 넘는 영남알프스가 있다. 가지산 백운산이 발원지인 태화강이 도심을 관통해 동해와 만난다.
동서 간 거리는 44.03㎞, 남북 간 거리는 43.18㎞. 울산광역시 승격 당시의 총면적 1056.28㎢였다. 서울보다 넓을 뿐만 아니다. 다른 광역시 중에서 가장 넓다. 1992년부터 직할시로의 승격을 추진하였다. 1995년 1월 울산과 울주를 합쳐 도농 복합도시가 됐다.
1997년 7월 15일 법률 제5234호 ‘울산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광역시 염원을 이뤄낸 거다. 도시 구획은 울주군을 완전히 포함하게 된다. 과밀화에 의한 기존 시가지의 용지난과 도시화에 따른 농촌 지역의 침체를 해소할 수 있다.
도농 간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광역시 전체의 공간 체계를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이후 19년 지난 2016년 21세기 울산 정주 시스템과 미래상을 재정립했다. 그 목표는 환태평양 거점 도시로의 도약과 비상을 담았다.
광역시 승격으로 기존의 중·남·동구에 북구가 신설되었다. 울주구가 울주군으로 다시 군으로 복원됐다. 중구는 법정동 19개와 행정동 14개, 남구는 법정동 19개와 행정동 16개, 동구는 법정동 9개와 행정동 12개, 북구는 법정동 26개와 행정동 8개, 울주군은 2읍 10면으로 구성됐다.
1962년 울산시 승격 때 인구는 8만명, 광역시 승격 당시의 인구는 101만 3070명. 울산 지역은 국가 공단으로 지정된 1960년대를 기점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였다. 1995년 시군 통합과 1997년 광역시 승격으로 환동해권의 거점 도시로 발돋움한 거다.
광역시 승격은 지방자치 부활이 계기였다. 시민 평가를 새롭게 매긴 계기이기도 하다. 정치 경제적 역할과 기여도에 부합할 지자체 위상을 강력하게 요구한 건 지역민들이다. 여기에 온산이라는 큰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울산은 온산 최형우 전 의원이 내무부 장관 때 광역시로 승격했다. 정확하게는 장관 그만 둔 뒤, 병상에서였다. 입법은 다 통과돼 공표만 통과돼 있었다. 당시 내무부 장관 권한은 막강했다. 지방자치 단체장 직선제 실시 전이라 전국 광역단체는 물론, 250개 기초단체장 임명권한을 지녀서다.
하지만 권력무상 인생무상이다. 지금 온산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경기도 위례신도시에서 27년째 와병 중이다.
부인 원영일 여사는최 장관이 쓰러진 후 27년째 내조하고 있다. 원 여사는 건강한 모습으로 손님들에게 “내가 잘하는 게 밥 대접입니다”라고 활짝 웃는다.
최 장관이 모시던 김영삼(YS)은 엄혹한 5공 폭압 당시 23일간 사즉생 단식투쟁을 했다. 당시 신문은 신문이 아니었다. YS의 단식 뉴스는 단 한 줄도 기사화하지 못했다. 비루한 5공 언론들 대신 거리의 편집자가 나섰다. 바로 민주산악회다.
민주산악회는 YS 단식을 삐라로 제작해 거리에 뿌렸다. NYT, 아사히 등 외신들이 대서특필했다. 특히 NYT는 YS의 단식을 알린 선봉이었다. 참 무지막지한 시절이었다.
울주군 서생의 퇴락한 유학자 집안 출신인 최형우는 여야 합의로 1996년 12월 26일 광역시 승격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수훈갑이다. 광역시 승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 한나라당 9룡 쟁투가 벌어질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래서 1997년 7월 15일 광역시 승격 조치가 발효돼 광역시로 되는 광경조차 직접 보진 못했다.
모진 병고에 시달리며 세상이 세번 바뀌는 과정을 인고했다. 온산도 온산이지만, 그를 병구완한 원영일 여사는 참 대단하다. 투병 중인 남편을 “장관님”이라 부르며 여전히 지극정성 모신다. 저녁은 10첩 반상을 차려낸다니 말 다했다.
온산 최형우 장관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울산의 광역시 승격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꼭 27년 전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