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YS “맹순이 잘 자라”…손명순 여사 김영삼 대통령 곁으로
“41년 전, 어느 봄날 YS는 아침상을 물린 뒤 지필묵을 꺼냈다. 그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大道無門’과 ‘軍政終熄’을 썼다. 두번째 군정종식을 써내려갈 때,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여느 때와 달리 YS의 마음은 천금만큼이나 무거웠다. 아침 식사 때도 한마디 말도 않은 채 그릇을 단숨에 비운 뒤 숟가락을 놓았다. 아내에게 “덕룡이 부인을 만나라”고 했다. 당시 YS는 2차 가택연금이 된 지 1년 가까웠다. 비서 김덕룡(DR)은 출입 금지자로 분류돼 있었다. 손명순과 김덕룡의 아내가 만나 밀지를 주고받곤 했다. ‘단식에 들어간다’는 글을 은밀하게 준비하라고 김정남(YS 집권 후 교문수석)에게 알려주라는 말을 손 여사가 DR 아내를 만나 승용차 속에서 전했다. YS는 그해 5월 18일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광주항쟁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상은 필자가 작년 문민정부 출범 30주년을 맞아 연재한 YS 재평가 글 중 일부다.
YS의 영원한 배필 손명순 여사가 7일 오후 하늘의 별로 올랐다. 향년 95. 2015년 YS가 서거한지 9년 만이다. 손 여사는 2022년 12월부터 코로나19로 중증 폐렴에 걸려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차남 김현철 김영삼기념재단 이사장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말 편안히 영면하셨다”고 전한다.
YS는 생전에 자택에 손 여사와 연애할 때 사진을 걸어놓고 흐뭇한 표정으로 자주 바라봤다고 한다. 손 여사와 YS의 애틋한 일화들은 많다. YS는 그를 “맹순아, 맹순아”라고 불렀다. “애들도 있는데 왜 자꾸 이름을 부르느냐”고 눈을 흘기면 “내가 안 불러주면 누가 맹순이 이름 불러 주노!”라 했다.
“니도 내한테 ‘영삼아, 영삼아’ 해라”고 천연득스럽게 대꾸하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 때도 “맹순이 잘 자라” 하며 손을 꼭 잡곤 했다. 동갑내기 아내는 그런 YS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역대 퍼스트레이디들 중 ‘조용한 내조’의 아이콘 중 한분이 손 여사다. 그러나 손 여사가 작심하면 오기의 YS도 고집을 꺾곤 했다. 손 여사는 중요한 일이 생기면 저녁상을 물린 후 동갑인 YS에게 “니, 이리 온나!”면서 담판을 지었다.
“니, 꿈이 대통령 아이가!” 반말 투가 나오면 고집 센 YS도 여지없이 귀를 기울였다.
YS는 2011년 결혼 60주년을 맞은 회혼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한 거고 다른 하나는 60년 전 손명순을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다.
YS는 “김영삼의 오늘이 있음은 손명순의 한결같은 사랑과 내조 덕택이었음을 여기서 고백한다”고도 했다. “이 자리에서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참 고마웠어. 사랑하오”라고 말하면서 손 여사와 뽀뽀를 했다.
YS는 손 여사를 “최고의 보좌관”이라고 치켜세웠다.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이 내용은 동영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YS는 1995년 2월 관례를 깨고 손 여사 모교인 이화여대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이 사립대 졸업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여러분의 선배 한분과 가족을 이룬 나도 이화의 가족”이라고 말하며 손 여사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조용한 퍼스트레이디’ 처신으로 박수를 받았다. YS 재임 때 참모 부인들과 모임도 없애고, 입는 옷의 상표를 떼고 입을 정도로 구설에 오르는 것 자체를 피했다.
‘정치9단’ YS를 내조하는 손 여사의 손길은 따듯했다. 상도동 자택에서 멸치 시래깃국을 끓여 손님을 맞았다. 민주화투쟁의 길을 걷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도왔다. 손 여사는 1929년 1월 2남7녀 중 장녀로 경남 진영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중인 1951년 3월 6일 부산 피난 때 YS와 가약을 맺는다. 수석으로 입학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 재학 때다. 마산에서 고무신 공장을 하는 부잣집의 딸로 자랐다. 서울대 철학과 3학년으로 YS가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에 갓 입문했을 때다. 두 사람은 선을 본 뒤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YS는 “결혼할 때가 아니다”며 선 보라는 것을 뿌리쳤다. 그래서 조부가 위독하다며 YS를 한 날 고향 거제로 불러내렸다.
그때 이대생 3명과 선을 보게 되는데, 마지막 사람이 손 여사다. “문학 얘기를 하는 걸 보면서 ‘참 멋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이후 잡힌 다른 선 자리는 모두 취소했다.
손 여사는 약사면허도 땄지만 약사 일은 한 적이 없다. 손 여사는 매일 같이 100여명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야당 정치인들이 다들 어렵게 사니까 매일 아침 상도동에 가서 시래기국밥을 먹었다.”(김기수 YS 비서)
명절 때 손 여사가 시아버지께 부탁해 받은 멸치를 포대째로 동지들에게 선물했다. 고인은 YS가 서거한 2015년 11월까지 64년 동안 남편 곁을 지키며 묵묵히 내조했다. 그러나 행동이 필요할 때는 결연하게 나섰다. 남편이 1983년 23일간 신군부에 맞서 사즉생 단식을 할 때는 외신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알리기도 했다.
당내 경선 때는 직접 대의원들을 찾아가 한 표를 호소하기도 했다. 3당 합당 때 “군부독재 세력과 손잡을 수 없다”며 끝까지 합류를 거부한 온산 최형우 전 장관과 일화도 흥미롭다. 어느 날 YS가 온산을 불러 상도동 자택에서 몇시간 설득했다. 얼굴을 붉히며 서재에서 나오던 온산과 손 여사가 마주쳤다.
“오래 하던데 이야기가 잘 되었나요?” “아니 총재님이 저보고 돌대가리라…” 그때 손 여사가 “아니, 큰 돌 작은 돌끼리 얘기를 잘 하지 않고”라며 미소지었다.
씩씩거리던 온산도 손 여사의 재치있는 한 마디에 웃고 만다. YS가 권좌에 오른 뒤 내무장관에 임명된 온산은 “저, 형수님 아니었으면 안 따라왔심니더”라고 털어놓았다.
30년 가깝게 와병 중인 온산을 지극정성으로 내조하고 있는 원영일 여사는 손 여사와 친분이 아주 깊었다. 선거 때마다 두 사람은 전국을 누비며 선거운동도 함께 했다. 내조의 여왕들인 두 사람은 남편들 흉도 보며 동고동락했다.
원영일 여사는 “손 여사는 머리가 좋고 타고난 선거전략가였다. YS가 대통령 되는 데도 공이 컸다”며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다.
청렴했던 YS 부부는 퇴임 이후 힘든 나날을 보냈단다. 손 여사는 YS 서거 당시 상도동 자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임종 소식을 듣고는 “춥다. 안 추웠는데 춥다”며 손을 떨었다. 두 사람이 천상에서 다시 만나 아픔을 달래고 안식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