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영원한 고려대 총장’ 독립운동가 김준엽의 길
김준엽 탄신 100주년 기념 <김준엽의 길 3,200km> 출판
추석 전날 <김준엽의 길 3,200km>(윤영수 지음, 맥스미디어 간)를 읽었다. ‘영원한 고대 총장’이자 독립운동가 김준엽을 기렸다. 1923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났다. 사업을 일군 대쪽 유학자 집안이라 유복한 편이었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게이오대학에 유학했다.
이후 일제 말기에 징집돼 ‘돌베개의 장준하’와 의기투합, 충칭의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책은 김준엽의 대장정 경로를 따라가며 복기한 내용이다. 김준엽 선생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기획 출간됐다.
저자는 김준엽이 총장을 그만둘 때 국문과 3년생이었다. 그는 KBS 사극 등의 제작에 참여, 작가로 문명을 날렸다. 출간을 진두지휘한 박영배씨는 고려대 법대 72학번으로 정동영 신경민 등과 전주고 동기다. 한국경제에서 신문밥 20여 년 먹었다.
고대 재학 중과 졸업 후 김준엽 선생을 존숭했을 거다. 책을 읽고서야, 선생이 안암골에서 뒹군 이들에게 ‘영원한 총장’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세월의 풍화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책 서문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이 회고한 바, 1987 헌법전문을 함께 기초한 건 처음 알았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김준엽 선생을 6공 노태우 정권을 비롯해 이후 집권한 YS, DJ까지 총리로 모시려 했다. 이종찬 회장은 책 서문에서 당시를 상기시켰다. “1988년 1월 나는 김준엽 선생 댁에 직접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총리로 모시면 좋겠다’는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의 명을 받아 김 선생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총리직 제안을 점잖게 거절하는 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꼿꼿한 대인의 원칙적인 풍모를…”
참 대단한 인품과 기개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총장을 그만두게 된 저간의 속사정을 알면 더욱 존경의 염을 표할 수밖에 없다. 제자를 구하려고 애를 썼던 스승의 기개 말이다. 폭압시대 아픔을 딛고 일어선 꿋꿋한 대쪽이었다. 선인이 말씀하신 바, 눈·서리가 내려봐야 송죽의 절개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학도호국단 법령을 거부하고 직선으로 총학생회장을 선출했다.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 부활 운동 주동자를 모두 제적하라는 교육부의 지시가 잇따랐다.
1984년 11월, 민정당사 농성사건에 관련돼 구속된 대학생들도 제적시키라고 요구했다. 당시 고려대 총장 김준엽은 재판을 지켜본 후 유죄판결이 나면 그때 조치하겠다고 끝까지 버텼다. 그러자 교육부는 표적감사로 교직원 자녀 20% 가산점의 특례입학을 문제 삼았다. 그 특례는 대학에서 입학사정 규칙으로 정해 운동특기자와 함께 관례적으로 해온 조치다.
교육부 장관은 “사표를 내지 않으면 재단에 총장 승인취소 통고를 하겠다”고 을렀다. 결국 김준엽은 특례 학생 25명을 제적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교육부 장관은 이듬해 2월 졸업식을 치른 이후,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지 말라고 강요했다. 총장 재직 중 그는 해직교수들을 원 소속대학으로 복직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정부가 승인하게 만드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민주당 의원인 김의겸 등 민정당사 농성 111명의 제적도 막아냈다.
책에는 1985년 눈물의 졸업식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선생의 퇴임사를 행간에 담긴 뜻까지 소상히 소개했다. 감동의 뭉클함이 가슴에 치솟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졸업생을 대표한 여학생의 절규에 가까운 답사까지.. “이게 끝이 아니라, 총장님을 지키는 투쟁은 계속될 것…” 그 시절에는 참다운 스승들이 있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도 존재했다.
특례학생 및 민정당 점거 운동권 학생들까지 몸을 던진 그의 살신성인으로 살아났다. 참 스승의 총장 사퇴에는 시대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당시 5공 폭압으로 민주화세력은 기진맥진 상태였다. 겨우 대학가만 무력하게나마 간간이 투쟁을 이어갔다.
해수부장관을 지낸 김영춘이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24살 무렵, 선생은 총장실로 김영춘을 불렀다. 김준엽이 그에게 “지금 몇살인가?”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일어서 한동안 창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네 나이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봤네…”
김영춘은 “자네들이 한 행동이 ‘애국심의 발로’라고 생각하네”라고 술회했다. 김준엽은 “학교는 학생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네. 자네들도 학교를 믿고 합당하게 행동을…”라고 절제할 것도 당부했다.
“생각만 해서는 부족하고 무엇인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는 우리 민족의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회고록 <‘장정>) 김준엽은 ‘마지막 광복군’, ‘행동하는 지식인’, ‘장준하의 벗’이다. 올해는 12년 전 하늘의 별이 된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칼날 위에 선듯 아슬하게 살아가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품위를 지키며 옳고 바른 길을 갔다. 그 지행합일의 실천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에도 맞지 않는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임.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 성균관(성균관대)교육을 시켜온 나라 대한민국임.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 Royal 서강대(성대다음 예우). 성균관대(양반대학)와 서강대(가톨릭계 예수회의 귀족대학)만 Royal대며, 일류.명문임. 주권.자격.학벌 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일본 점쇠 천황이 세운 마당쇠 대학), 그 뒤 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서민출신 이용익의 보성전문 후신 고려대일것. 성대와 서강대 밖의 리그로 본다면 주권.학벌없는 서울대, 연세대(본캠), 고려대(본캠), 이화여대.이화도 주권.학벌은 없지만, 왜구 서울대가 연세.이화 필요하던 미군정때의 대중언론 도전. 성균관대에 오랫동안 도전을 해와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카르텔은 전분야에서 아주 강합니다.
헌법이나, 국제법, 한국사, 세계사의 자격은 대중언론.입시지의 준동을 아랑곳 하지 않는 특질을 가졌습니다.또한 주권.학벌이 없는 서울대와 추종세력의 약탈을 인정해 줄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해방후 미군정기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대중언론.입시지에서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도전해 온 한국의 주권.학벌없는 대학들의 약탈기사와 그 과정은 잘 바뀌지 않을것으로 보여집니다. 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국사 성균관 자격.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 Royal 서강대(세계사의 교황반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세계사때문에,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으로 그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태학.국자감의 승계대학인 경사대학당 후신 베이징대가,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처럼 세계사 자격을 인정받을수 있는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