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장군의 여인들···러시아 갈리나·폴란드 올랴·한국 김마리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 등을 지낸 철기 이범석. 독립운동 시절 셰퍼드와 찍은 사진.

[아시아엔=박남수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회장] 철기 이범석 장군의 광복군 시절 부관이었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철기에 대해 3W의 사나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War, Wine, Women의 첫 글자다. 망명 독립군은 어떻게 사랑과 이별, 그리고 결혼을 하였는가? 철기는 소탈하게 그의 인생사를 주변에 털어 놓곤 했다.

철기가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를 오가며 투쟁하던 때 그의 나이는 20~30대. 여인이 없을 리 없는 때였다. 화약 냄새 가득했던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에서 철기에게도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정회(情懷)들이 있었다.

북만주 ‘광야’의 갈리나, 톰스크 ‘눈의 여인’ 올랴

1925년 초, 철기가 만주와 러시아 경계지역에서 중국 군벌 장총찬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였다. 국경선 순찰을 마치고 복귀하던 철기는 삭풍속의 광야를 지날 즈음 사람을 찾는 묘령의 러시아 여성을 만난다.

“저의 이름은 갈리나, 니꼬르스키에서 오빠를 찾아왔어요.” 그녀는 백계러시아 여성이었다. 백계군 중대장이던 그녀의 오빠는 적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국경선을 넘어 뽀그라니치나야 방면으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이역에서 만난 외로운 이성들은 쉽게 연인이 되었다. 오로지 전장의 화약 냄새만 맡고 지내던 철기에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철기는 영고탑에 있는 김좌진 장군으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보를 받고는 갈리나를 버려둔 채 떠났다. 영고탑에서 3개월 정도 지난 후 김좌진과 이범석은 군관학교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뽀그라니치나야를 향해 길을 떠났다.

중간 지역인 마교하역에서 철기는 바에 들어섰다가 우연히 바의 여급으로 있는 갈리나와 스친다. “갈리나!” 철기는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하였다.

철기는 김좌진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털어 놓았다.
“흐음! 그런 사유가 있었구먼!” 김 장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철기에게 47원이라는 제법 큰 돈을 디민다. “이 길로 당장 가서 사과하고 오시오.”

철기는 어두운 바의 한 모서리에서 한사코 피하려는 갈리나에게 용서를 구한다. 갈리나는 눈물만 소나기처럼 흘린다. 3년이 지난 어느 가을날, 철기는 우연히 철로이동을 하다가 역에서 승무원 복장의 갈리나를 만난다.

“나는 지금 열차승무원으로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에요. 이젠 모든 게 정상적이고 희망에 넘쳐 있으니 안심해요. 안녕!” 철기의 첫 연인, 광야의 여인 갈리나는 그렇게 떠났다.

눈의 여인 ‘올랴’는 폴란드 여성으로 톰스크 여자중학교 문학교사였다. 러시아 황제 짜르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출신 그녀의 아버지는 러시아군 장교로 톰스크로 부임하여 왔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들은 그대로 시베리아 한복판 톰스크에 남은 것이다.

철기는 눈의 도시 톰스크 거리에서 올랴와 우연히 마주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라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교제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짜르의 지배 아래 있던 폴란드. 말과 글을 억제당하고 착취와 탄압을 당하는 모습이 일제 압제 하 조선과 그리도 똑같았다. 마담 퀴리와 쇼팽, 그리고 탄압받는 역사를 화제로 둘의 관계는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사간이 흘러 시베리아의 봄이 찾아왔다. 러시아와 중국간 협상으로 이범석 일행은 귀국하게 되었다. 올랴와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철기와 그녀와의 정회는 소설 <톰스크의 연인들>에 남았다. 이범석의 톰스크에서의 연애담을 바탕으로 대만작가 푸내부가 쓴 소설이다. 주인공 올랴가 ‘설희’이다.

철기의 운명 때 그의 운구차를 따르던 철기의 마지막 애마, 눈의 여인 ‘설희’는 ‘올랴’의 환생이었다.

영원한 ‘혁명동지’ 김마리아

마리아는 1901년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선대가 러시아로 귀화한 한국인이었다. 철기가 고려혁명군 기병사령관에 이어 수이푼 지구 합동민족군을 이끌던 시절, 마리아는 러시아 공산당에서 파견한 정치부원이었다.

공산주의자가 못마땅한 이범석은 마리아에게 간부직이면서도 한직인 피복창 주임 자리를 줘 접촉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한번은 니콜리스키에 있던 일본군대가 철기군대를 기습해 온 일이 있었다. 그 때 철기는 적의 공격으로 불타는 사무실을 향해 비밀문서를 가져나오기 위해 혼자 돌진해 들어가는 마리아를 목격하고는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상하관계일 뿐이었다.

어느 날 피복창에서 새로 군복을 해왔는데 바지가 퍽 편하게 잘 만들어졌다. 그래서 피복창 주임에게 정성스럽게 잘 만들었다고 감사인사를 전해달라고 했더니 오후에 부관이 “사령관 동지의 의복은 피복창 주임인 자기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전해주었다. 고마운 생각과 더불어 섬세함이 느껴졌다.

스빠스가야 전투가 둘 사이의 전환점이었다. 철기는 전력을 다해 강력한 요새 스빠스가야를 함락시켰다. 그 때 마리아는 자원해서 간호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마리아는 철기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고 “철기에게 온 마음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고 훗날 고백하였다.

1925년 마리아는 러시아를 탈출하였다. 인텔리였던 그의 친가 대부분이 공산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되자 마리아는 숙청을 피해 철기를 찾아나선 것이었다. 재회에 한없는 반가움을 가지면서 두 청춘남녀는 이내 백년가약을 맺기로 한다.

김좌진, 조성환 두분의 후견으로 한쌍의 ‘혁명동지의 결혼’이 이루어 졌다. 마리아와 결혼 후 철기는 하얼빈 근처 오주로 이사한 후 고려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하여 일제 관동군을 괴롭혔다. 이때 필요한 권총이니 수류탄이니 하는 것의 구입은 모두 마리아의 몫이었다.

밀고와 즉결처분이 난무하던 북만주 국제도시 하얼빈이다. 아녀자 마리아는 유창한 러시아어를 바탕으로 하얼빈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무기 밀구입을 도맡아 한 것이다.

해방이 되어 국내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마리아는 철기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나는 고국의 말도 서툴고 고국의 풍속도 아는 것이 없소, 하지만 당신의 생활을 돌봐주고 당신이 시련과 유혹에 부딪치면 당신의 명예를 지켜주겠오.” 그리고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다.

철기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시절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금 반상기를, 또 한번은 현찰을 두 트렁크 가져왔다. 두번 다 마리아가 문전퇴짜를 놓았다. 철기에게는 상의 한마디 없었다.

마리아는 공무나 정치에 관해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 딱 한번 빼놓고. 철기가 6.25전쟁 중 대만대사로 출국당하고 나서 이승만이 다시 내무장관으로 기용하려 할 때였다. 화가 난 마리아가 경무대로 가 이승만에게 대들었다. “국외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아쉬우니까 또 불러들이는 건 뭐냐?”고, 이 때 이 대통령이 정가야화로 남아 있는 유명한 한마디를 했다.

이승만 “내가 당하기는 했지만 철기보다 그 아내가 훨씬 낫더군.”

1970년 2월 마리아는 철기보다 2년 먼저 타계한다. 철기는 몇달 뒤 꿈에서 그녀를 보고는 한밤 중에 일어나 마리아를 그리는 한편의 시를 쓴다.

빈방 찬 이불에 잠 못 이루어
이슬 맺힌 베란다에 달빛 기울고
호수 같은 가을 하늘 밤은 5경
남녘 연변에 가로등 가물가물

철기의 부인 김마리아, 본명은 마리아 엘레노브나 킴이다. 정부는 1990년 그녀의 하얼빈 일대 고려혁명군 결사단 활동과 중국군관학교에서 러시아어와 중국어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마상 쌍권총의 달인이라는 속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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