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공대 갈래, 서울공대 갈래?”···이승만 재평가 ‘시급’
이승만, 6.25전쟁 직후 한국판 MIT 꿈꾸며 인하공대 설립
명문고 졸업생들 대거 지원 인하공대 입학식에서 축사
인하공대 출판물인 <인경> 1984년 4집에 이 대학 30년 약사가 실려있다. 약사를 보면, 인하공대는 1954년 개교를 한다. 경기 서울 경복을 비롯, 경남 부산 경북 광주일고 등 전국 일류고 졸업생들이 지원했다. 입학식 때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왔다. 우남은 6.25를 겪으면서 소련제 탱크와 UN군 최신 무기들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 GNP 82달러의 가난한 나라에 가장 긴요한 게 자주국방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제대 군인들을 미국으로 보내 공업기술 교육을 받게 한 것이다.
그리고 공대들을 신설했는데 그 중 첫번째가 인하공대였다. 그 후 인하공전도 세우고, 독일로부터 공작기계 등을 지원받아서 공학도를 양성했다. 우리의 대학제도는 건국 대통령인 우남이 초석을 놓았다. 친일과 독재자라는 오명을 쓴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이 대학제도의 골격을 잡았다. 그중에도 우남은 가히 ‘교육대통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우남은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김법린(1899.8.23.~1964.3.14) 문교부 장관에게 인하공대 설립을 지시했다. 하와이 교포 성금과 100만달러의 정부 보유 달러를 보태 인하공대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에 우남은 자신이 운영했던 하와이 한인기독학교를 처분해 마련한 쌈짓돈까지 보탠다.
‘인천’과 ‘하와이’에서 첫 글자를 딴 인하공대 설립자는 우남 이승만으로 뚜렷하게 기록돼 있다. 휴전을 코앞에 둔 1953년 6월 4일, 우남은 인하공대 설립과 관련한 담화를 발표한다.
“이 대학의 주지는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MIT와 같은 공과대학을 만드는 것이니 우리 사람들이 예로부터 문과나 철학 등을 숭상하던 의도를 많이 변동해서 이 물질시대에 기계학과 공업 발전의 물질세력을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니….”
우남은 이 대학에 무기공학과도 두려고 마음먹었다. 인하공대 설립 초기 6개 학과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방산에 관심이 깊었던 것이다. 설립 4년 후, 인하공대에는 최초로 원자력공학과가 창설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대에도 원자력핵공학과가 세워졌다. 두 대학에서 배출된 원자력 인재들이 대한민국을 ‘원전 강국’으로 만든 주역들이 된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원려와 심모로 식민지에서 해방된 최빈국은 종합국력 6위권에 오를 수 있었다.
우남이 미국으로 보내 배워온 제대 군인들도 한국의 공업발전에 큰 힘을 보탠 원동력이었다. 박정희의 공업입국은 우남의 기여 덕분에 탄력을 받는다. 한국이 60년대 이후 수출 드라이브를 걸면서 공학 및 기술 인력은 더욱 긴요해졌다. KIST와 KAIST, ADD 등이 70년대 초에 잇따라 세워졌다. 외국 유수 대학에서 수학한 연구 및 기술 인력을 초빙했다.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때 석·박사 등 인력들이 기술지원을 해 산업발전을 이끌었다. 이 바람에 70년대 말 수출은 급성장하게 된다.
이승만 시대에 초석을 놓고 투자한 과학기술은 80년대 더욱 빛을 발해 오늘에 이른다. 우남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33년간 해외체류 중 대부분을 보낸 하와이를 못 잊었다. 하와이 동지회와 교감하며 연을 이어갔다. MIT를 만들겠다고 하자 하와이 동포들은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매각해 자금을 보탰다.
인하공대의 이름도 우남이 직접 지었다. 우남은 4.19 후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총격과 부정투표 등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하와이 교민들은 우남이 서거할 때까지 생활비를 댔다. 하와이 동포들은 끝까지 이승만의 벗으로 남았던 거다.
국가보훈부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어느 지도자에게나 공과는 있다. 그러나 우남의 공과를 굳이 따지자면 7대3, 8대2로 공이 더 많다고 본다. 무엇보다 공산세력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유민주체제의 건국 대통령이다.
6.25 남침을 끝내 물리치고 한미동맹을 혈맹으로 끌어올려 오늘날 번영의 초석도 놓았다. 교육대통령으로 인하공대 등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며 대학제도의 기초를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농지개혁으로 자본주의의 바탕이라고 할 사유재산제 토대를 세운 바 있다.
문맹이 80%나 되던 시절, 의무교육을 비롯한 국민교육에 힘을 쏟은 것도 돋보인다. 그런데도 건국 대통령을 위한 기념관이 없다는 건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남이 교육 대통령 자격이라는 데 나부터 깜깜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일방적 글에 세뇌된 탓이다.
우남 하면 무조건 4.19 때 비무장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하게 만든 독재자로만 기억했다. 장기 집권욕으로 3.15 부정선거까지 획책한… 그러나 하와이 이민사를 살펴보면 우남의 삶은 그동안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게 많다. 하버드와 프린스턴대에서 석 박사를 한 선각으로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깊이 자각했다. 거기에 대항해 자유민주의 가치를 지켜내며 건국을 하고 북의 6.25 불장난을 막아냈다.
우남은 장기집권 및 독재라는 허물도 있지만 대한민국 역사에 빛날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어제, 다부동에 UN군 파병을 적시에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과 함께 우남의 동상도 세워졌다.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인하공대에 세워져 있던 우남의 동상도 80년대 무너졌다. 그 동상이 지금 인하대 창고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30여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우남의 동상. 그 먼지를 털고, 다시 동상을 교정에 세울 때다. 하와이는 우남에겐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우남과 프란체스카 내외가 만년에 살던 하와이 마키키 집에는 간간이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러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탱이라는 오렌지 분말가루를 물에 타 쿠키와 함께 내놓았다. 그만큼 우남은 궁핍하게 말년을 보냈다. 귀국 전날 당국의 불허 통보를 받기도 했다. 우남이 쓰러져 입원한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내 뼈는 반드시 조국에 묻어달라”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런 말년 스토리는 가슴이 아픈 대목이다. 1965년 7월 27일, 이역만리에서 쓸쓸하게 지내다 숨을 거둔 우남의 장례식이 열렸다. 영결식은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지냈다.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연도에는 100만 시민들이 몰려나왔다.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많은 민초들이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은 고인을 애도했다.
우남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진국의 여느 독재자들과는 달랐다. 결코 사사롭게 욕심을 채우는 부정축재 따위를 하지 않았던 거다. 하와이 동포가 묘비석을 보낼 때까지 국립묘지 내 그를 추모하는 비석 하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
우남은 역사에 빛나는 민족의 지도자라는 거다. 당시 민초들이 그렇게 판정을 한 것은 아닐까? 나는 우남의 건국과 호국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거기에 더해 공업입국의 초석까지 놓았다니!
너무도 기울어진 우남 재평가가 참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