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정치이야기] 정치폭력과 정당방위 사이…서민호 의원의 경우
“사형!”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69년 전 7월 1일 현역의원인 서민호 의원이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을 죽이려던 현역장교 서창선 대위를 사살한 살인 혐의였다. 우여곡절 끝에 징역 8년이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이 사건 판결은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정당방위 판례로 인용되고 있다.
1952년 4월 24일 전남 순천의 한 식당에서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죽이려던 서창선 대위를 총으로 쏘아죽였다. 서 대위가 먼저 서 의원을 향해 총을 쏘았고, 서 의원이 도망가면서 쏜 총에 맞고 서 대위가 숨졌다. 검찰은 서 의원을 살인죄로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당시 부검도 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화장하도록 했다.
마침 이승만 대통령이 제출한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심의하기 위해 임시국회가 피난수도 부산의 문화극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국회가 석방요구 결의안을 94 대 0으로 가결시켜 서민호 의원이 5월 24일 석방됐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시위대가 담당 판사(안윤출) 하숙집을 습격했고, 부산 시내 곳곳에 ‘안윤출을 암살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틀 후(5월 26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서민호 의원은 다시 구속돼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장 최경록 소장은 사건에 대한 나라 안팎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정당방위 여부를 자세히 심리해야 한다며 선고를 한 달이 넘게 미뤘다. 최경록 재판장이 버티자 재판장이 박동균 준장으로 바뀌었다.
박동균 재판장은 사건을 인계받자마자 서민호 의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바로 1952년 어제였다. 국회의원 131명이 재심을 청원했다. 사형 판결 3일 뒤에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이 통과됐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징역 8년으로 줄었다. 사형에서 징역 8년으로 줄어드니 영남지구 계엄사령부가 반발해 재심을 하게 됐다.
재심을 맡은 군법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재판을 질질 끌다가 비상계엄 해제 뒤 민간법원으로 사건을 이송했다. 대통령직선제로 치러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당선된 뒤 비상계엄이 해제됐다. 사건을 배당받은 양회경 부장판사는 살해 협박과 온갖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정당방위였다며 서민호 의원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선고에도 불구하고 서민호 의원은 끝내 8년 옥살이를 다해야 했다. 군 지휘관의 재심 명령이 잘못됐다는 검찰 주장을 상급 법원이 받아들인 거였다. 항소심을 맡은 대구고등법원은 재심 요건이 안 되어 이미 징역 8년형이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서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틀 뒤인 1960년 4월 29일 형기를 채우고 출소했다.
직접적 문건이나 증언은 없지만 사건 발단부터 재판, 출소까지 과정과 정황을 보면 정치보복 정치폭력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중 국민방위군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쳤고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조사단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껄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서민호 의원은 출소 후 석 달 만에 실시된 제5대 총선에서 당선됐고 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독재정권에 대한 서민호 의원의 저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4년 제6대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대통령을 탄핵한다’며 박정희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때는 여당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는데, 후보 사퇴 전 발언(‘국민에게 큰 부담인 국방비 절약을 위해 감군해야 한다’)으로 대선 직후 구속됐다.
서민호 의원은 16세 중학생 때 3.1 운동으로 6개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또 일년 옥살이를 했다. 1961년 5월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남북교류를 주장했다고 입건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일도 있다. 평생을 독립과 통일,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서 의원에 대한 사형선고, 정당한 판결이었을까, 정치보복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