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 칼럼] “6.29냐 속이구냐···중요한 건 6월항쟁의 성과물”

노태우 전 대통령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권 이양.”

36년 전 오늘(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발표한 6.29민주화선언의 핵심입니다.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대통령 선거법 개정과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등도 포함돼 있습니다.

정권 최대 위기인 6월 항쟁을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으로 겨우 넘길 수 있었습니다. 민중항쟁에 의한 급격한 변혁요구를 달랜 6.29선언은 점진적인 개혁을 담고 있습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세력이 시민을 향해 공개적으로 민주화를 약속한 6.29선언은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존엄성 존중과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율성 보장 등 언론자유 창달,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 보장과 지방자치·교육자치 실시, 대학 자율화, 정당활동 보장으로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 조성 등 6.29 선언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민주화 조치들은 바로 6월 항쟁에서 드러난 시민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들이었습니다.

노태우 대표는 자신의 제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민정당 대통령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민정당은 6.29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추인했고, 전두환 대통령도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신군부 군사독재의 청산이 시작된 6.29선언을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항복선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6.29가 항복선언이 아니라 위기 국면을 빠져나가려 일시적으로 시민을 속인 ‘속이구’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집권세력에서는 시민의 민중항쟁에 밀려 항복한다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는데 만세를 부른 셈이 됐다는 말들이 흘러나왔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첫번째 대통령으로 노태우 후보가 뽑혔기 때문입니다.

1987년 6월10일 민정당 노태우 대선후보(왼쪽)와 손을 맞잡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

6.29선언은 처음엔 노태우 대표가 단독으로 결단해 강경한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6월 항쟁을 경찰력으로 통제하지 못하자 6월 19일 육군참모총장이 ‘작전명령’을 내렸지만 군을 출동시키지 않았고, 며칠 뒤 6.29선언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전두환 작품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직선제 개헌에 소극적인 노태우 대표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입니다.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 1여2야의 3파전이나 1여3야의 4파전이 되므로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는 겁니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6·29선언을 노 대표 처남 박철언이 주도해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 등 서울대교수들과 함께 작성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여러 논의를 종합해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주도하고 노태우 대표가 발표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를 요구했던 미국의 역할에 주목하는 분석도 있습니다. 6월 항쟁이 거세져 계엄령이나 위수령 등 군 투입 가능성이 커지자 미국이 전두환 정권에게 야당과 타협하라고 압력을 가했다는 겁니다.

6.29선언 주체가 전두환이냐 노태우냐 하는 건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전시민적 항쟁으로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의 일시적 양보라는 주장이 맞느냐 틀리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시민 저항을 약화시키고, 저항세력을 분열시켜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정치전략이냐 아니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6.29가 군부독재 청산 계기가 됐다는 게 중요합니다.

대통령직선제 부활 후 첫번째 대선에서 정치군인 노태우의 당선은 김영삼-김대중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탓도 있습니다. 저항세력 분열로 민선 군부정권이 들어선 걸 6.29의 평가절하 근거로 삼아야 할까요. 신군부의 강경 억압통치가 민주화 타협으로 바뀌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틀을 닦은 6.29선언은 6월항쟁의 성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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