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정치이야기⑦] 야당 ‘유진산 파동’과 여당 ‘이준석 파동’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당원권 6개월 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정치사상 가장 젊은 나이 36살에 거대정당 대표가 된 이 대표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당 중앙윤리위원회가 징계를 내린 혐의는 성접대와 증거인멸 의혹입니다. 그러나 언론과 정치권은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과 이 대표의 갈등을 징계의 본질로 보고 있습니다.
정당 대표가 당내에서 수난을 겪는 일이 처음은 아닙니다. 유진산 야당 총재는 두 번씩이나 총재직에서 쫓겨났습니다. 1964년에는 언론장악 의도로 여당이 밀어붙인 언론윤리위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여당과 야합했다는 의혹으로 민정당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이것이 ‘1차 진산파동’입니다. 7년 뒤인 1971년 2차 진산파동으로 두 번째 쫓겨났습니다.
유신 직전인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신민당은 야당으로선 역대 최고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선거 직전보다 44석 늘어난 89석을 차지했습니다. 득표율은 44.4%였습니다. 진산파동이 아니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뒀을지도 모릅니다. 진산파동이 진행되는 동안 유세 계획도 세우지 못하는 등 당이 혼란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산파동은 유진산 총재가 총선 후보등록 마감 직전 자기 지역구 영등포 갑에 정치신인 박정훈을 공천하고 자신은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면서 벌어진 갈등을 말합니다. 유 총재의 느닷없는 지역구 포기에 당은 혼란에 빠졌고 여러 의혹들이 제기됐습니다. 유 총재가 포기한 지역구의 여당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 처조카사위(장덕진)였습니다.
진산파동 처리를 놓고 당내 계파들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유진산의 당수직 제명과 출당을 요구한 건 비주류였던 신파 계열이었고, 주류였던 구파 계열은 유진산 제명 불가를 주장했습니다. 유 총재 집 앞에서 청년당원들이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중앙당사에서도 물리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진산파동은 주류-비주류 갈등으로 번졌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6인 수권위원회를 구성한 뒤 유진산 총재를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내놓았습니다. 신민당 주류는 비주류인 김 후보의 당권 장악을 막기로 하고 거부했습니다. 논란 끝에 유 총재 당직 사퇴와 김홍일 당수권한대행 취임으로 진산파동은 마무리됐습니다. 당장 선거가 급했던 것입니다.
유진산 총재는 “당수직 사퇴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습 노력을 당권다툼으로 몰아간 겁니다. 어쨌든 진산파동을 계기로 대선 이후 뒤로 물러나 있던 김대중 후보가 당 운영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당수권한대행직을 차지하지 못한 건 주류의 반대도 강했지만 유진산 총재가 사표를 내지 않아 합법적으로 권한대행에 취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년 뒤 유신체제 하에서 다시 총재로 복귀한 유진산은 박정희 대통령과 만난 뒤 타협 화합을 내세워 비판받기도 했고, 1974년 유신헌법개정투쟁 선언 직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한동 자민련 총재도 2006년 4월 7일 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자민련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 총재가 DJP 공조가 깨진 뒤에도 “총리직과 당적을 함께 유지하겠다”고 밝힌 것이 해당행위라며 의원총회를 열어 제명했습니다. 국회 의석수가 15석밖에 되지 않아 포기했지만 이날 의총에서는 이 총리 해임건의안 제출까지 거론됐다고 합니다.
직무가 정지된 이준석 대표는 임기가 남아있으므로 6개월 뒤 다시 대표직에 복귀하게 됩니다. 이 대표는 당 안팎의 사퇴 압박에 버티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감을 계속 부각시키려 할 겁니다. 윤핵관은 6개월 동안 당을 ‘친윤’ 중심으로 재편하려 할 겁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힘이 당내 싸움에 매달려 국정에 더 소홀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