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정치이야기②] 정치욕심이 낳은 위헌적 발췌개헌

이승만 정권 당시 관제데모

7월 4일은 첫 번째 개헌이 이뤄진 날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오늘 피난수도 부산에서 헌병과 경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발췌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제1차 개헌의 핵심은 국회가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시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166명 의원 가운데 163명이 찬성했습니다.

압도적 지지로 가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제1차 개헌과정에서는 온갖 불법이 난무했습니다. 내무장관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했던 의원들을 전원 등원케 하겠다는 포고문까지 발표하고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해 찾아냈습니다. 간첩혐의가 있다며 불체포특권까지 무시하며 구속했던 의원들까지 강제 등원시켜 기립표결을 하도록 했습니다.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한 배경에는 국회 간선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어렵다는 판단이 있습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이 대통령 지지세력이 대거 떨어졌습니다. 원래 제2대 총선도 패배가 예상되었고, 그래서 이 대통령이 12월로 연기하려다가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반대로 예정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회 구성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불리한데다가 총선 한 달 만에 터진 한국전쟁으로 이 대통령의 재선은 더 멀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으로 민심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11월 29일 대통령 직접선거와 양원제가 골자인 개헌안을 제출했습니다. 이 개헌안은 1952년 1월 18일 부결되었습니다. 반대가 143표였고 찬성은 19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 대통령은 빨치산을 핑계로 전북 경남 부산 등에 계엄령을 내리고 정치파동을 일으키는 등 공포정치를 강화했습니다.

2월 15일 부산 여기저기 국회의원 소환을 요구하는 괴벽보가 나붙었습니다. 백골단 땃벌떼 등 무시무시한 이름의 단체가 붙인 벽보의 내용은 매우 거칠었습니다. 신익희 국회의장의 집이 포위당하기도 했습니다.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한국전쟁으로 연기된 지방선거를 갑자기 실시해 지방의원들을 앞세워 국회의원들을 압박했습니다.

이에 맞서 4월 17일 야당 의원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다음날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내각제 개헌안 반대 공동투쟁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5월 14일에 5개월 전에 부결된 개헌안을 부분적으로 고친 다음 다시 제출했습니다. 직선제 개헌이 여의치 않자 정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헌병대가 크레인을 동원해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통근버스 째 강제 연행하기도 했습니다. 야당의원 10명을 국제공산당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국회가 통과시킨 구속의원 석방과 계엄해제 결의안도, 유엔 한국위원단의 국회의원 석방과 계엄령 철회 요구(5월 29일)도 무시됐습니다.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을 탄압하면서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에 야당 제출 개헌안의 국무위원 불신임제를 절충한 ‘발췌개헌안’을 만들었습니다. 장택상 국무총리는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가 해산될 수도 있다”며 의원들을 협박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 한 달 뒤인 8월 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정치사를 한 마디로 특징짓는다면 헌법의 제정과 개정이 정치의 중심 주제로 작용했던 개헌사라 할 수도 있습니다. 개헌 문제는 잠복되어 있다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요한 정치 현안으로 대두하였고 그 때마다 많은 정치적 파장을 남겼습니다. 중요한 건 대통령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무리한 국정운영이 늘 문제였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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