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정치이야기③] 박지현을 위한 변명
“등잔에 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말랐다(油盡燈枯)” 장개석 오른팔 격이었던 대만 논객 천부레이(陳希雷)가 장개석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공산당원임이 드러나 체포된 딸과 사위를 장개석이 풀어준 뒤 천부레이는 이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알린 구절입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은 ‘등잔에 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마른’ 상태입니다. 대선 패배 이후 구성된 비대위는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다시 새로운 비대위가 들어섰지만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희망을 줄 ‘비상대책’을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가 마른 등잔에 기름을 채울 처절한 반성도 통렬한 다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10년 보수정권을 물러나게 한 건 더불어민주당의 힘이 아니라 촛불민심이었습니다. 보수정당은 권력을 넘겨주고도 바뀌지 않았고, 실망한 시민은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든든한 지원을 얻고도 시민의 기대에 못 미쳐 민주당은 다시 야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당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야당은 ‘소금’이며 ‘등불’이어야 합니다. 정치가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이어야 합니다. 어두운 밤에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등불처럼 현실정치에 실망한 시민들에게 희망을 갖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상호 비대위의 역할은 민주당이 소금이 되고 등불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집권 두 달밖에 안됐지만 국민의힘 정부는 시민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서는 데드크로스 현상이 벌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당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여전히 과반을 훌쩍 넘긴 제1당입니다. 국민의힘의 독선과 독주를 제대로 막을 수 있고, 시민이 바라는 건 다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선장이 되어야 거대야당 더불어민주당 호를 민심의 바다에서 살아남게 하고 야당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하도록 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대명(어차피 대표는 이재명)’이니 ‘’친명-반명 전쟁‘이니 하는 말들, 68세대(60년대생 80년대 학번)는 물러나고 79세대(70년대생 90년대 학번) 대표가 나와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 선출은 민심과 당심으로 결정됩니다. 당 지도부가 되고자 하면 비전과 공약으로 민심과 당심의 선택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특정인의 출마를 둘러싸고 된다, 안 된다, 분당 운운하는 논란이 왜 벌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분당까지 거론되는 건 민주당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대선 때도 경선 후유증에 따른 아쉬움이 당원과 지지자들 사이에 논란이 됐습니다.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선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력을 다 해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 송영길 후보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출마했습니다. 송 후보 출마의 적절성 여부와 당선가능성을 놓고 당내에서 비판이 워낙 많았기 때문입니다.
소속 정당에서도 출마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기기 힘들다고 공격 받는 후보를 적극적 지지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찍어주겠습니까.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에 대한 공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치경험이 거의 없는 지방대 출신’이라는 비아냥은 정말 한심했습니다. 당을 위기에 빠뜨린 건 ‘정치경험이 많은 서울의 명문대 출신’들 아니었나요?
기존의 질서에 반항하고 도전해 달라고, 갈등과 잡음을 만들어서 문제를 풀어나갈 매듭을 찾아달라고 박지현 위원장을 영입했을 겁니다. 문제제기를 ‘내부총질’이라고 문제 삼았던 기존 질서에 매달리면 더불어민주당에 미래는 없습니다. 박 비대위원장의 당 대표 출마가 규정 때문에 무산된 건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